커피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
작년에 얻은 깨달음 중 가장 귀한 것은 역시 내 행복의 조건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내 생일에 깨달았다. 나는 내 생일의 모든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무엇을 할까 고민도 하지 않고 단번에 계획을 끝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저녁 일정을 제외하고 내가 내 자신을 위해 선택한 생일 일정은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미뤄둔 읽을거리를 읽는 거였다. 집 근처의 작고 아늑한 카페에 가서 플랫화이트를 마셨다. 헤드폰에서는 내가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까다롭게 선정해 쌓아둔 플레이리스트의 셔플이 흐르고 있었고, 노트북으로 오래 창을 띄워두고 미뤄뒀던 아티클들을 읽었다. 맛있는 커피, 좋아하는 노래, 재미있는 읽을거리. 이 세 가지만 있으면 나는 행복해진다. 혹시나 속단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 또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인 새해 전날에 같은 것을 시험해보았다. 생일 때 갔던 것과는 다른 카페에 갔고, 이번에는 카푸치노를 마셨고, 카페 플레이리스트에 저항없이 귀를 맡겼으며 핸드폰에 설치된 이북 앱으로 미리 사 둔 소설을 읽었다. 참 행복했다.
그럼 맛없는 커피도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최근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나는 커피의 맛에서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커피를 마시기로 결정하고, 커피를 어디서 마실지 결정하고, 어떤 커피를 마실지 결정하고,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그 따뜻한 컵을 받아들고 향을 맡은 뒤 비로소 한 입을 홀짝이는 순간을 모두 소중하게 생각한다. 냉장고에서 꺼낸 지 오래되어 미지근해지면 느껴지는 쓴맛이 다소 유쾌하지 않은 소주와는 다르게 커피는 처음 받아들었을 때부터 마지막 방울을 마실 때까지 모든 순간이 즐겁다. 따뜻한 커피를 시키면 다 마실 즈음에는 분명히 미지근하거나 차가워져 있고는 한데, 본디 아이스 커피를 즐기는 나는 그때조차 감사하게 즐긴다. 아이스 커피를 시키면 다 마실 즈음에는 분명히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져 있고는 한데, 물을 마시는 습관이 제대로 들지 않은 나는 그때조차 수분 섭취의 기회로 여긴다. 커피는 어떻게 해도 행복이다. 이토록 확실한 행복을 주는 음료, 아니, 음식 전체를 통틀어도 이런 것은 없다.
나는 커피가 성인이 된 이후 생긴 가장 좋은 일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고등학생 때는 거의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늘상 죽치고 있던 수학학원에는 믹스커피가 비치되어 있었지만 그건 손님용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등학생들이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와 친구들에게만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매점에 가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가끔 커피를 산다면 그건 선생님께 갖다 드리는 용이었다. 에너지 드링크도 마시지 않았다. 잠이 너무 많아 자주 혼나곤 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한번 쓰러지고 나서야 그 잠은 갑상선 항진증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커피를 마시지 않고도 고등학생 시절과 입시를 치른 내가 조금 대견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쨌든 나는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자유롭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직 스타벅스라는 프랜차이즈가 그 고고한 위상을 잃지 않았을 때였는데, 입학하게 된 대학교 정문 앞에는 2층짜리 단독 건물의 스타벅스가 있었다. 내가 수업을 듣는 건물들은 모두 후문 쪽에 더 가까웠지만 나는 일부러 품을 팔아 그 스타벅스에 가고는 했다. 공부를 하러, 과제를 하러, 팀플을 하러, 친구를 만나러, 친구를 만나서 과제를 하는 척 끝없는 수다와 푸념을 늘어놓기 위해 시험 공부를 하는 척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앉아 핸드폰만 몇 시간을 들여다보다 뭐라도 한 것 같은 거짓 성취감을 느끼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기 위해. 그때는 내가 스타벅스라는 프랜차이즈를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그냥 커피를 좋아하는 거였다. 아니면 스타벅스를 좋아하다 보니 커피를 좋아하게 된 것일수도 있겠다.
나는 스무 살 때부터 거의 항상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유당불내증 비슷한 것이 있는 데다가 -사실 한국인들은 대부분 그렇다고들 하지만- 달콤한 음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인기였던 초콜릿 프라푸치노라든가 아이스 모카라든가 하는 음료들은 입에 잘 대지 않았다. 라떼도 마찬가지로 별로였다. 얼음이 녹으면 우유와 물이 섞여 이상한 맛으로 밍밍해지기 때문에 라떼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따뜻한 라떼를 마셔 보니 그것 또한 취향에 맞지 않았다. 어차피 우스운 말로 들릴 수는 있겠으나 플랫화이트와 카푸치노는 좋아한다. 내 혀가 우유 거품은 좋아하는 모양이다. 우유가 들어가는 음료, 라떼, 카푸치노, 플랫화이트는 산미가 있는 원두로 마실 때 특히 맛이 좋다.
커피를 좋아해서 매일 마신다고 하면 원두의 차이를 알아챌 수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나는 솔직히 대답한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 걸 내가 알아챌 수 있었으면 바리스타를 하고 있었겠지. -지금이라도 도전해보는 건 나쁜 생각이 아닐지도- 나는 신맛과 쓴맛의 차이만 안다. 원두 선택권을 주는 대부분의 카페가 그 두 가지 옵션을 갖추고 있다. 과일이나 꽃향이 주로 나는 산미가 있는 커피. 초콜릿과 살짝 태운 듯한, 고소한 향이 중심이 되는 쓴맛의 커피. 원두 이름은 항상 다르고 외우기도 어렵다. 대충 원산지와 한글로 일곱 자쯤 되는 복잡한 꾸며낸 이름을 붙여 원두 이름이라고 속이면 누구나 다 속을 것 같다. 콜롬비아 이니미니마니모 원두. 과테말라 아리스토텔레스 원두. 이런 거. 원두 선호에 대해서 딱 하나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로스팅이 중간-강하게 된 원두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타벅스에서 바리스타로 일했던 경험에서 알게 되었다. 맞다. 스타벅스를 너무 좋아해서 그렇게까지 했다. 하여간에 스타벅스에서 쓰는 기본 아메리카노 원두는 에스프레소 블렌드라고 하고, 이것은 다크 로스트에 속한다. 그리고 라이트한 로스트로 블론드 로스트가 있는데, 이게 내가 정말 안 좋아하는 로스트다. 원래는 베란다 로스트를 제일 싫어했는데 블론드가 대대적으로 나오고 나서부터는 이게 제일 싫다.
이쯤에서 내가 마셔본 가장 맛있는 커피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호주는 원래 커피로 유명한 나라고, 그중에서도 멜버른이 제일이라고 한다. 내 멜버른 여행 계획은 하루에 최소 2잔의 커피를 포함하게 설계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맛있었던 곳을 꼽으라면 역시 Patricia Coffee Brewers다.
아침 일찍 도착해 카푸치노를 테이크아웃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커피였다. 어떤 점이 끝내줬는지를 전문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말솜씨와 지식 모두 부족하니 그냥 가서 마셔보라는 말밖엔. 한국에도 들어온 적이 있는 듁스커피를 비롯해 유명하다는 카페들을 꽤 많이 들렸지만 여기가 최고였다. 가게가 매우 좁고 협소해서 마시고 가는 사람들조차 창밖에, 건물 벽에 삼삼오오 모여 기대어 머그잔을 홀짝이고 있다. 여유롭게 누군가와 깊은 담소를 나눌 장소로는 부적합하겠지만 커피 하나만 놓고 보면 내겐 여기가 최고라 하겠다. 유럽과 영국, 미국 여행에서 마셔 본 어떤 커피도 내게 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덧붙여 서울에서는 커피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아예 없다. 아마 이것은 서울 카페 수준의 탓이 아니라 -꽤나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에서는 대부분의 커피를 즐기는 목적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갈 체력포션 주입의 목적으로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탓이 클 것이다. 물론, 평일 아침에 눈에 잡히는 대로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을 주문하던 프랜차이즈 카페뿐만 아니라 주말에 친구를 만나 함께 방문했던 유명 카페들과 로스터리에서도 별 감동을 받은 기억은 없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을 기대하기로 한다.
커피의 맛과 카페 경험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나, 완전히 분리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아무리 좋은 카페 -그 정의가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나, 내게는 입장부터 퇴장까지의 방문 경험 동안 불쾌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 곳이라는 정의를 갖는다-라고 할지언정 커피가 맛이 없으면 전반적인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경험으로서의 방문도 늘 유쾌한데 커피까지 맛있는 곳이라면 소중히 여길 수밖에. 하지만 말했듯이, 나는 맛없는 커피에도 큰 불만을 갖지 않고 심지어 카페가 앉아있기는 별로거나 아예 앉을 수가 없어 테이크아웃만을 해야 하더라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커피를 마시는 일 그 자체다. 내게 커피를 마시는 건 그 날 하루를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두지 않겠다는, 오늘의 생각과 감정들을 붙잡아두고 싶다는 바람이다. 반쯤 졸린 상태로 오후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다. 이 사치스러운 음료와 그것이 주는 침착한 환기와 오래 맴도는 향기와 대개 확실한 위안을 오늘도 내 자신에게 허락하겠다는 자기돌봄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셨다. 오늘 마신 커피는 슈퍼마켓 한 구석에 마련된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커피였다. 솔직히 맛으로만 따지면 마셔본 것 중 최악의 커피 중 하나라고 하겠다. 하지만 커피와 달디단 빵 하나를 함께 구매하면 삼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즐길 수 있었다. 어떻게 불평하겠는가? 커피의 가장 좋은 짝꿍은 버터가 잔뜩 들어간 페이스트리다. 초콜릿도 들어가 있으면 더 좋다. 오늘 내가 고른 것은 초콜릿 크루아상이었다. 휴,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그 커피는 맛이야 어쨌든 확실한 각성효과를 주었고 이 커피를 주제로 글을 쓰고 싶다는 영감까지 주었다. 역시 나의 만병통치약. 카페인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