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결혼 이야기>, <오징어와 고래>, <LTNS>
나는 따지자면 비혼주의자지만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상황이 어떻게 바뀔 줄 알고 단언하겠는가? 그냥 지금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 정도로 갈음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간 결혼이라는 주제는 내 관심사에 가까웠던 적이 없는데 최근 대학 친구 중 한 명이 결혼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변 지인들이 슬슬 결혼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한 사람의 인생사에서 그 사건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는 걸까? 신혼부부는 청약 심사기준에서 가산점이 높으니까? 호적상 서류에 서로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나의 삶을 나 혼자 떠받치는 것은 어느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라? 경제적 생활과 운명 공동체가 주는 안정이 필요해서? 아니면 그냥, 그럴 때가 되어서? 그런 기분이 들어서?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그도 아니면, 그냥, 너무 외로워서?
어렸을 때는 결혼이 평생을 약속하기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그 생각이 깨졌다. 이혼이 나쁜 흠결이라거나 인생의 실수라거나 하는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결혼해 봤더니 영 아니면 이혼할 수도 있지. 우리는 모두 인생의 실수를 늦게라도 되돌리고 싶어하잖아. 그게 인생의 실수였다는 걸 깨닫고 인정하는 게 오래 걸릴 뿐이지. 하지만 이혼은 망한 사업을 수습하는 것만큼이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경제적 분할과 양육권 소송에 아주 길고 긴 시간과 많은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 어떻게든 상대를 이겨먹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때 평생을 약속했던 상대를 죽도록 상처내고 꼭 그만큼의 상처를 되돌려받아 주저앉는 사람들. 내 의문은 이거였다. 너무 사랑하고 평생 함께하고 싶을 수 있다. (서로에게 따로 원하는 바가 있어, 또는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강요하고 떠밀리듯 하는 결혼은 일단 논외다) 하지만 그 다짐이 흐려지고 바래질 수도, 피치못하거나 귀책 사유가 있는 어떠한 사정으로 지키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가 아주 빈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경제적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결혼까지 결심한 건, 혼인신고를 하고 모든 것을 합치고 공유하기로 결정한 건 자신들은 그럴 일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그 정도로 확신한다면 굳이 결혼이라는 의식은 필요없는 것 아닌가?
우연인지 숙명인지 작년엔 파탄난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여럿 봤다.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정리씩이나 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다만 이 이야기들이 결혼에 대한 내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적어볼 생각이다.
Anatomy of a Fall (2023) Dir. Justine Triet
작년 이맘때 내용을 거의 모른 채 보러갔던 것이 생각난다. 사실 이 영화의 초점은 결혼 생활의 파탄보다는 '누구를 어떻게 믿어야 할까' '진실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맞춰져 있다. 비극적 사건에 대한 해부에 가까운 분석, 단죄의 기준과 권한과 영향, 지극히 개인사적 비극에 반응하는 도파민이 필요한 대중.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는 파탄 직전에 이른 부부, 산드라와 사뮈엘이 서로를 할퀴며 논쟁하는 부분이다.
프랑스 남자인 사뮈엘과 독일 여자인 산드라는 글을 사랑하여 만났고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회상처럼 등장하는 둘에 대한 묘사를 보면 글을 좋아하고 작가로서의 목표가 있는 것 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다른 사람끼리 결혼했으니 당연히 싸우고 파탄이 나지, 하고 가볍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사람은 자기와 완전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놀라울 정도의 안정감을 얻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고 그게 인생을 다 걸 정도로 좋아하는 무엇이라는 사실은 그 관계에 엄청난 낭만을 더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뒤 서로를 운명공동체로 받아들였다고 해도, 인생의 본질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라서 둘 역시 예상치 못한 고난과 역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아들 다니엘은 고통을 겪고, 그들의 창작물은 세상에서 대조적인 반응을 받고 있고, 두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현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다. 부부는 이처럼 변화하는 상황과 거기에서 오는 의견 차이와 감정의 골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파탄에 이른다. 내가 가진 의문은 이거였다. 그들이 결혼을 결정할 시절, 더 젊고 싸울 기력도 더욱 왕성했을 시절, 그러나 역시 상황이 한치 앞도 알 수 없게 변화하던 시절에도 서로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몰랐을까? 둘의 관계를 위협하는 고난과 역경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던가? 서로를 파트너, 짝꿍, 배우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인가? 나이를 먹고 감정적 체력이 떨어져서? 시간은 은행과도 같고 더 이상 낭비하고 싶지 않다고 느껴서? 마침내 내면의 한계치에 도달해서?
이 영화의 각본가는 쥐스틴 트리에와 아르투 하라리이며, 둘은 사실혼 관계에 있는 파트너다. 그리고 쥐스틴 트리에가 감독했다. 이 영화는 사뮈엘의 입장도 산드라의 입장도 어떠한 진실도 시원하게 밝혀주지 않는다. 1인칭 시점에 가까운 장면들에서조차 그 인물의 속내를 완전히 알 수 없는데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산드라에게 좀 더 공감하고 그녀를 이해하려 애쓰게 된다. 나는 그것이 사뮈엘이 현재 시점에서 이미 죽은 상태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 자체가 적고, 회상 씬에서 그의 생각과 발언을 엿볼 수 있지만 현재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혼의 파탄을 다루면서 아내의 입장을 더 견고하게 서술한 이야기. 여기에서 <추락의 해부>와 내가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다른 영화들 사이의 차이점이 생긴다.
Marriage Story (2019), Dir. Noah Baumbach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면 집중이 어렵다. 1분에 한번씩 뭐가 쾅쾅 터지는 영화가 아니라 이렇게 각본의 힘과 잔잔하고 감성 있는 연출을 고집하는 영화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지만 어쨌든, 개봉한지 4년이 넘어서야 보기로 결정했고 넷플릭스에서는 내려갈 일 없이 올라와 있었으므로 선택권이 없었다. 집중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걱정이 무색하게 러닝타임 내내 인물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게 이 포스터에서 배우들 이름 위에 붙은 한줄들의 이유겠지.
니콜과 찰리는 역시 같은 창작적 열망을 공유하고 있는 커플이다. 극단의 대표이자 연극 감독인 찰리와 왕년의 스타로서 배우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니콜. 둘은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이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고, 상담 치료를 받아보려고도 하지만 쉽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각자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거주지가 분리되자 이 관계에는 제대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건 그거였다. 니콜과 찰리는 서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걸 해결하고 계속 함께하기 위해 노력해봤지만, 결국 물리적으로 분리되고 불편하게나마 얼굴을 부딪히는 일이 거의 사라지자 감정적으로도 제대로 단절되고 말았다. 찰리와 니콜은 정말 다른 사람들이지만 둘은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기보다는 서로의 다른 모습 그 자체에 끌림을 느낀 듯 하다. 그리고 아직도 서로의 그 다른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둘을 갈라놓은 것은 무엇일까? 둘의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에 빠졌을 때는 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좋은 점만 보이지는 않아도, 나쁜 점까지 속속들이 보이더라도 그걸 볼만큼 그 사람을 훤히 들여다보고 알고 있고 또 매일 조금씩 더 알게 되기에, 그럴 수밖에 없기에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매몰된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 다른 상황, 다른 목표, 다른 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 우선순위가 조정된다. 그로 인해 감정이 틀어진다. 인생의 경로가 다른 데다 감정까지 틀어지기 시작한 사람들을 묶어주는 것은 물리적 공간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같은 공간으로 돌아와 일상의 일부와 전부를 공유하고 부딪히는 것이 관계를 지속시켜 준다. 설령 매일 서로를 상처내며 싸우더라도, 싸움 자체는 관계의 연장선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공간의 분리와 함께 시야와 가시 영역이 완전히 재조정되고, 이 관계는 연장될 동력마저 잃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변호사를 고용하면서 감정으로 이어진 끈의 가능성은 희미해진다. 이제 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나 '부부 이야기'가 아닌 '끝나기 직전의 결혼 이야기'가 된다.
이 영화의 감독은 노아 바움백이고 각본 역시 노아 바움백이다. 그가 남자라서 니콜의 입장을 대충 서술했다고 매도할 생각은 없지만, 찰리에게 이입할 구석이 훨씬 더 많도록 연출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있는 투톱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보고 있으면 '화자'는 명백하게 찰리라는 생각이 든다. 니콜은 '대상'이다. 영화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로 인한 감정이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사건과 감정의 이유이자 촉발제이자 '이야기의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인물. 말했듯이 이것이 <추락의 해부>와의 차이다. 남자는 남편 입장에서만 쓸 수 있고 여자는 아내 입장에서 쓸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장 <추락의 해부>도 부부가 함께 쓴 영화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나는 이 미묘한 시각과 몰입도의 차이를 모른 척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찰리가 헨리를 안고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영화가 끝을 맺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출처를 따라가 보니 몇년 전 봤던 한 영화가 떠올랐다. 그 영화 역시 노아 바움백의 작품이었다.
<The Squid and the Whale> (2005), Dir. Noah Baumbach
앞선 두 영화가 부부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자녀들에게 초점을 맞춘 영화다. 파탄나고 분리된 부부 관계가 아이들에게, 특히 사춘기를 지나는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청소년이 어떤 감정을 겪고 어떤 식으로 인생을 둘러싼 혼란을 이해하며 경험하게 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 영화는 <결혼 이야기>보다 조금 더 날것인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감독 본인의 시선이 포장지과 거름망과 제련과정 없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자전적인 영화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작중 '화자'라고 할만한 인물은 큰아들 월트이므로, 월트가 부부이자 부모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감독이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던 시선일 것이다. 월트는 어머니보다 아버지 편을 들고,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비난하고, 어리고 자유롭던 시절 네 어머니에게 충실했던 과거를 후회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20년 전의 영화인데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라서 간신히 용서받을 수 있을까말까 한 소리를 간간히 한다. 그가 느끼는 혼란과 두려움과 불안을 이해할 수 있었음에도 노골적인 남성주의적 대사가 편치 않았다. 노아 바움백이 노골적이고 참아줄 수 없이 남성주의적인 감독이라고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도 않을 뿐더러, 이 영화가 월트와 그 아버지를 도덕적으로 무결하다고 옹호하고 연민만이 가득찬 시선으로 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 영화와 <결혼 이야기>, 그리고 <추락의 해부>를 함께 놓고 생각할 때 비슷한 플롯을 가진 영화들임에도 시각과 서술의 차이가 있음을, 그리고 그 차이가 창작자의 성별에서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 편의 영화들 외에도 실패한 부부 관계에 대한 드라마 역시 작년에만 두 편을 봤다. 근데 대체 왜 이렇게 많이 봤지? 뭐야, 혹시 나 작년에 결혼에 실패하고 싶었나?
(2024), Dir. 전고운, 임대형
'불륜 추적 활극'이라는 소개는 반 정도만 사실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리고 시리즈 전체의 전개를 꼼꼼히 들여다볼 수록 이 쇼는 주인공 부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이 쇼에서 좋았던 것은 남편과 아내 둘 다의 입장이 충분히 대변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남편인 임박사무엘은 유약하고 감정적이며 세심하고 무르지만 아내인 우진은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무심하고 냉소적이다. 하지만 임박사무엘의 감정에 과도하게 이입하게 되지도, 우진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되지도 않는다. 한쪽의 입장이 화자가 되어 사건과 상황과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두 인물의 입장과 사고 회로를 모두 보여주고, 시청자의 이해를 얻고자 하는 각본상의 세심함이 느껴진다.
이 쇼에서 가장 각광받는 장면은 6화, 사무엘과 우진이 빗물처럼 내리는 감정에 북받쳐 서로를 상처내며 싸우는 장면이다. 위에서 다룬 두 영화 <추락의 해부>, <결혼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두 사람 간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가장 격하게 충돌하는 장면이 최고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추락의 해부>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장면은 녹음과 산드라의 기억으로 재구성된 회상, 리와인드였다는 것과 <결혼 이야기> 내내 견지되는 찰리에게 화자의 위치를 부여하는 연출적 태도를 고려할 때 어느 한쪽에 조금도 치우치지 않고 다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LTNS>에서는 그 이전 에피소드들의 스크린타임과 이야기 전개를 활용해 두 인물에게 고르게 이입할 수 있도록 빌드업을 조절해 왔기에, 마침내 둘이 폭발하여 맞붙을 때에 시청자인 나는 누구 한쪽의 편을 들기보다는 그 관계가 부서지고 무너져내리는 것을 목도함에 진정한 안타까움만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이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깊게 사랑했던 만큼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기가 된다. 그 사람이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이 족쇄가 된다. 그 무기로 족쇄를 끊기보다는 차라리 영원히 서로에게 묶인 채 상대를 찌르고 싶은 것이다.
Fleishman Is in Trouble (2022-2023), Created by. Taffy Brodesser-Akner
뉴욕 타임즈 기자가 쓴 소설을 티비 쇼로 만든 것이다. 이 쇼의 주인공은 남편 토비 플라이시먼이고, 아내 레이첼 플라이시먼은 조연격 위치에 가까우며, 화자이자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나레이터는 토비의 친구 리비이다. 쇼의 메인 포커스는 부부관계의 파멸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가 쌓아오고 이뤄 온 것들에 대한 허망함, 또는 이루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회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그대로 소화하기에는 덜 현명하나 해결하고 상황을 뒤집기에는 너무 지쳐버려 주저앉은 채 울부짖는 40대의 단상이다.
이 이야기에서 부부 관계란, 결혼이란 차라리 하나의 성취이자 업적, 양쪽이 크레딧을 반씩 소유한 공동사업처럼 느껴진다.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에 거주하는 초상위 중산층의 이야기라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토비 플라이시먼과 레이첼 플라이시먼의 관계가 아니라 그들이 결혼이라는 결과물이자 수단을 향해 달리고, 그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려 했던 노력, 그리고 그것이 망해버렸을 때 각자의 삶에 미친 영향, 수습하고 견뎌내거나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방식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니 당연히 하이라이트는 두 사람이 서로와 맞붙어 감정을 폭발시키며 충돌하는 장면이 아니다. 쇼의 현재가 되는 시간대에서 둘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보다는 레이첼이 요가 클래스에서 혼자 고통스러워하며 소리를 지르던 장면과 토비가 반타 블랙을 마주하는 장면이다. 관계를 완전히 회피하고 숨어버린 레이첼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설득시키고, 토비가 공허와 허무감을 다른 것으로 덮으려 하지 않고 제대로 직면하는 장면.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아픔을 해소한 후에 서로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쇼는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며 끝을 맺는다.
그래서 결혼은 왜 하는 것일까? 결혼이라는 의식은 과연 무엇에 필요했던 것일까? 사뮈엘과 산드라는 왜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기로 결정했고 그랬으면서 왜 서로를 더이상 참아주지 못하게 되었을까? 결혼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상담가까지 고용했던 찰리와 니콜은 왜 변호사까지 고용해서 그것을 끝내려 하는가? 월트는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결혼을 하고 싶어할까? 하고 싶어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하고 싶지 않아한다면 그 귀책은 누구에게 있는가? 사무엘과 우진은, 토비와 레이첼은 왜 한번 실패한 관계에 새로운 기회를 주려 하는가?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두번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라도 있나? 각자 격양된 감정을 어느 식으로든 해소했기 때문에? 가끔 그렇게 서로에게서 떨어져 혼자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게 부부 관계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단계라면, 서로를 1분 1초도 쉼없이 서로의 곁에 영원히 묶어두어야만 하는 것 같은 결혼이라는 개념과 의식과 제도의 의의는 과연 뭐란 말인가?
그래서,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일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해볼 가치가 있는 미친 짓이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의문들을 만들어내는 경험이라면 당연히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안 할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기엔 너무 겁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