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회사 어디까지 가봤니?

10. 영어의 중요성

by 쟈니민

IT 쪽은 Google, Apple 등이 탑티어 회사라고 말하는 것처럼 화학회사에서는 BASF, Dow Chemical 등이 탑티어 회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탑티어라 함은 급여 수준,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 기업문화 등이 타기업에 비해 월등히 높은 회사를 의미한다. 나는 탑티어 미국회사인 A사, B사에서 근무를 했었다. 그중 B사는 아버지에 이어 나도 근무를 했던 각별한 인연이 있는 회사이다.


70년대 B사는 국내 석유화학 초창기 붐을 타고 대한민국 정부와 50대 50 투자를 해서 한국에 들어왔다. 회사명은 한양화학이고 공장은 울산에 있었다. 한양화학은 한국과 서양회사의 합작 화학회사라는 뜻으로 한국과 서양의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대의 국영회사라 사장은 군 장성이 퇴역 후 지명되었다. 아버지는 초창기 엔지니어로 한양화학에 근무를 하였고 70년대 미국 텍사스에 있는 B사 본사에도 출장을 다녔다 (커버사진 참조) 그러나 80년대 초반 B사가 한국에서 철수를 하였고 한국화약 그룹 (지금 한화그룹)이 회사를 인수하여 사명은 한화케미컬 한화석유화학 한화솔루션등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국내기업으로 운영 중에 있다.


80년대 B사가 한국에서 철수한 이유는 짐작건대 군사정권시절 정부에서 요구하는 여러 가지 요구가 회사의 글로벌 규정에 맞지 않고 회사 방침상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에 공장을 접고 철수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다시 한국에 들어왔는데 이때는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던 C사라는 외국계 회사를 인수 (merge) 하였고 동시에 소규모 국내회사인 D사도 같이 인수하였다. 나는 모든 인수가 완료된 후 B사로 입사하였는데 따라서 회사에는 B사로 입사한 사람, C사 출신, D사 출신이 같이 근무했다. 회사는 하나이니 급여 수준은 동등하게 책정되었고 특히 D사 출신은 급여가 상당히 오르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B사, C사는 대부분 서울의 상위대학 출신이었고 D사 출신은 그 외 공대 출신이 많았다. 급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서술한다. 사실 업무 능력은 어느 회사 출신인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큰 차이가 없고 좀 부족한 부분이 있음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고 실력이 조금 부족하면 공부해서 보충하면 된다. 하지만 금방 노력한다고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어 실력이었다.


B사 출신은 당연히 영어 면접으로 입사를 했고 C사도 외국계 회사였으니 영어가 됐는데 문제는 D사였다. 처음부터 영어를 중요 요소로 감안하고 뽑은 직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회사가 외국계로 바뀌면서 매일같이 해야 하는 영어로 된 서류 작업, 회의, 발표, 전화통화 등에 당장 영어가 부족하면 업무에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업무 환경이 되었다.


어느 정도 근속연수도 되고 나름 성실하고 평판도 좋은 D사 출신이 과장이 되었고 회사 방침상 각 직급에 따른 글로벌 워크샵이 상해에서 있었는데 당연히 한국의 신임과장도 참석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자기소개부터 워크샵, 발표, 저녁 만찬까지 모두 영어로 진행해야 하는데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여 수십 명 참가자 중 유일하게 통역이 긴급 투입되어 일주일간 고문에 가까운 워크샵을 참석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앞으로 모든 출장은 영어가 가능한 사람만 보내야 하는 방침이 생겨 D사 출신은 진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외국계 회사를 목표로 하는 사람은 영어 실력을 미리 쌓아두어야 한다. 제2외국어 공부할 시간에 영어 공부를 더욱 매진하라고 하고 싶다.


그 후 나는 프랑스회사 독일회사 네덜란드 회사도 근무했지만 나는 프랑스어 독어 네덜란드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 본사로 출장을 가도 다 영어로 소통을 했으며 회사의 공용어는 영어였다. 현지 직원들도 자기들끼리는 모국어로 얘기하다가 한 명이라도 외국인이 있으면 영어로 바꿔 얘기했으며 그것은 회사 규정이었고 직원을 소외시키거나 왕따 시킬 수 있는 환경 자체를 만들지 않았으며 현지 직원들도 상당히 이 부분을 조심하였다.


사실 독일 네덜란드는 회사 밖에서도 영어를 사용하여 생활하는데 큰 불편함이 없었는데 프랑스는 영어만 가지고는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출장 후 프랑스 여행을 하러 에어비앤비 숙소를 예약했는데 집주인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영어를 전혀 몰라 근처에 사는 손녀딸에게 전화를 걸어 10대 손녀딸이 긴급 투입되어 유창한 영어로 숙소를 예약하는 것을 도와준 에피소드가 있었다.


에피소드 2.

70년대 한양화학 공장에는 외국인 30% 한국인 70% 정도가 회사 사택에서 같이 살았다. 그 당시 사택은 미국인 기준에 맞춰 집을 지었기에 단층짜리 커다란 주택에 잔디밭이 포함되어 있었고 수영장 당구장 맥도날드 햄버거 비슷하게 맛을 내는 미국식 식당도 있었다 (지금 맥도날드 쿼터파운드 치즈버거와 맛이 비슷하다) 70년대 미국 엔지니어들이 타국에 와서 심심해하니 안테나를 세워 그 당시 울산에서는 유일하게 미국 방송인 AFKN이 나오는 장소였고 그때 봤던 미국 드라마와 Shanana, 소울트레인 같은 음악 방송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여름이면 미국에 있는 부인과 자식들이 아버지가 있는 한국 울산으로 놀러 왔는데 그들을 바라보고 때로는 같이 어울리는 신선한 문화경험도 했었다. 비슷한 나이라도 미국애들은 성숙했었고 수영복만 입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에 가면 재래식 화장실에 집에 TV, 냉장고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는 시절에 집에 와서는 마당의 잔디를 깎고 햄버거를 먹었으니 어쩌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입을 다물지 못하는 별천지였고 지금도 동창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 너네 집에 가서 수세식 화장실을 처음 봤다는 등의 옛날 얘기를 가끔 하곤 한다.


한양화학은 한미 합작회사라 미국공장장, 한국공장장 한 명씩 있었는데 미국공장장은 텍사스의 좋은 집안의 아이비리그 공대 출신이었다. 부부가 살았는데 부인 또한 좋은 집안의 엘리트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이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대학생하고 사랑에 빠져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갔고 졸지에 혼자가 된 미국공장장을 위로한답시고 아버지를 포함한 한국의 간부 직원들이 술집에 데리고 갔다가 그만 20대 초반의 술집에 근무하던 여자한테 (접대가 아닌 서빙하는 ..)반해 재혼을 하겠다고 해서 한국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고 회사의 공식 파티 자리에 미국공장장 부인 자격으로 그분을 데리고 나왔다. 한국의 간부 직원들은 대부분 스카이 출신에 서울대가 많았고 부인들 또한 이대 출신등 그 당시로는 초창기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앞장섰던 세대였으니 그 여자분은 어린 나이에 주눅이 잔뜩 들어 눈치를 보며 구석에서 말한마디 못하고 한국 부인들이 수군덕 거리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 후 미국공장장이 다시 미국으로 발령이 나서 귀국을 했고 그로부터 6-7년 후 다시 한국을 깜짝 방문했을 때 부인으로 같이 와서 환영 파티에 참석하였는데 20대 초반의 시골 아가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애 둘을 낳은 엄마에 능숙한 영어, 세련된 매너와 미모로 파티를 사로잡는 셀럽이 되어 사택의 한국 부인들이 아무 말 못 하고 그녀를 바라만 보는 인생 역전의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미국서 손녀 손자와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오래전 70~80년대 외국계 회사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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