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2, 메모어 19기
살다보면 검은 구덩이에 폭하고 빠져 버리는 순간을 마주한다. 대학교 시절 상담센터 문을 두드렸을 때, 상담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예지님 앞에 구덩이가 있어요. 그 위에 임시방편으로 검은 천을 덮어두었죠. 삶이 순탄하다고 생각할 거에요. 당장은 그게 보이지 않으니까. 살다보면 돌부리 걸려 넘어지듯이, 그 안으로 빠져버리곤 하는 순간이 있어요.
지금은 그런 시절인 거에요. 운이 나빠서 구덩이에 빠진 것이 아니에요. 그저 거기에 있었고, 제대로 추스리지 않았으니까. 다시 발을 헛딛은 것 뿐이에요.그러니 우리 같이 대화하며 메꿔보아요."
그 이후 내 앞에 놓인 여러 구덩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차마 오래 들여다보거나, 메꿀 용기가 없어, 그저 얇은 천 하나 덮어두었던그 기억들을.
또 빠졌네. 그럼 다시 나와야지, 그리고 다시 뛰어야지. 앞으로.
나를 주저앉게 하고, 쉬게 하는 그 구덩이를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바라본다. 또 쉬어갈 차례가 왔네. 지겨워, 그리고 아주 가끔은 반갑기도 하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사람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해서. 잠시 멈추어,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글과 말. 눈을 맞추고, 함께 웃고 울기도 하며,
나에게서 벗어나 타인의 삶을 엿보는 시간을 보낸다. 구멍. 타인의 구멍일수록 더 쉽게 빠지는 것 같다.삶이 벅차다고 느껴질 수록, 구멍을 더 자주 찾는 나를 발견한다. 구멍에 빠지면 조금 더 느린 호흡으로 삶을 바라보게 된다.
그 조그마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미뤄왔던 일들을 한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로, 곁의 이에게 집중하고, 또 나에게 집중한다.구멍,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빨려 들어가는 곳, 의외의 즐거움과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는 곳, 때로는 가시 돋힌 덫을 마주하는 곳.
구멍 난 양말. 오래 쓰다보면 마주하는 것. 때로는 기워 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것.
그리고 구멍 난 스펀지 같은 삶.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구멍을 감추려 애쓰기를 포기하면 알게 된다.
온갖 비와 바람을 마주하는 순간, 그 수분이구멍을 타고 흘러와 스펀지 같은 삶의 몸집을 부풀린다.그로 인해 팽창하고, 그로 인해 더 거대해지는 삶을 마주한다.
구멍난 스펀지 같은 삶. 그 끝에 마주한 거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