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안 되어도 괜찮아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훨씬 더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예전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여행을 좋아한다. 세상은 넓고 내가 가보지 않은 장소는 많다.
나는 새로운 걸 경험하는 걸 좋아한다. 사실 은근히 보수적이고 안전지향적인 성격인 내가 새로운 걸 좋아한다는 게 조금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내가 좋아하는 새로움이라는 것은 안정적인 것 위에 얹어지는 고명의 새로움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외식을 할 때 안 가본 음식점을 가는 걸 좋아한다.
최근에 7박 8일로 유럽 여행을 갔다 왔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좋은 걸 많이 해봐서 역치가 높아져서 그런지 해외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예전보다는 줄었다. 하지만 해외 여행은 여전히 즐거웠고 역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돌발 상황들을 만났다. 그리고 예전의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서 여행도 할 수록 느는 것을 깨달았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허만 고센(Hermann Heinrich Gossen)이 주장한 고센의 제1법칙은 한계효용의 체감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이 법칙은 어떤 사람이 동일한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함에 따라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도(혹은 필요도)가 점차 감소한다는 것이다.)
먼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좋아진다.
여행은 아무리 열심히 준비를 해도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남편이 기차를 잘못 예매했는데, 빠르게 움직인 덕에 놓치지 않고 잘 탈 수 있었고, 기차에서 캐리어를 묶어 놓기 위해서는 동전이 필요했는데 환전이 제대로 안 되어서 필요한 동전이 제대로 없던 상황에서 탑승 직전에 동전을 구했다. 그리고 내릴 때 동전을 다시 받을 수 있는데 하나는 제대로 안 나왔지만 빠르게포기하고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 외에도 짜잘한 변수들이 많았는데 여행하는데 별 어려움이나 불안함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십 대 중반에 처음 해외 여행을 직접 준비하고 여행을 하면서 허둥지둥대고 마음이 불편했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알게 되고, 나에게 적절한 페이스로 여행 일정을 짤 수 있다.
10년 전에는 체력이 더 좋기도 했지만 일단 유명한 것은 다 해봐야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뭘 좋아하고 취향이 어떤 건지도 정확히 모르고 유명하다는 건 다 했다. 여행 시간은 항상 한정되어 있다보니 꾸역꾸역 시간을 쪼개서 여러 관광지를 돌았다. 유명하다는 건 다 봤기 때문에 뭔가 뿌듯함은 있었지만 실제로 즐거웠는지는 모르겠다. 바쁘고 힘들게 돌아다녔다는 기억이 더 많은 것 같다. 요즘은 내 체력을 고려하고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거 위주로 충분한 시간을 넣어서 돌아다닌다.
계획을 철저하게 안 짜도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
파워 J이지만 빠듯하게 짜봤자 짠다고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시간을 잘게 쪼개면 변수가 생겼을 때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게 된다. 정말 중요한 것들만 미리 정하고 나머지는 상황에 맞춰서 정해도 된다. 식당도 미리 다 알아보고 가는 것보다는 걸어다니다가 괜찮아 보이는 곳의 구글 지도 리뷰를 한 번 확인하고서 들어가도 충분하다. 제한된 시간이라는 것에 매몰되고 다시 오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빠듯하게 짜던 처음의 모습도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면 다음에 또 올 수 있겠다 싶고, 오지 않게 되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도 미리 준비를 하거나 알아보고 가는 건 많은 도움이 된다. 여행을 하면서도 기억에 더 많이 남고 알차게 보낸다는 느낌이 든다.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다면 유튜브에 검색해서 영상 한 두개를 보고 가면 미리 예습하는 기분으로 갈 수 있다.
여행의 장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해왔다. 예전에는 '견문이 넓어진다'는 말이 별로 안 와닿았는데, 여행을 하다보면 진짜 견문이 넓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온전히 여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좋다. 남이 해준 밥을 먹고 집안일을 할 필요도 없고, 오늘은 뭘하면서 놀까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 집에서 보내는 휴가는 사실 그냥 일상의 연속이다. 새로운 장소에서 보내는 한정된 특별한 시간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다만 남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여행을 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SNS가 너무 발달해서 다른 사람들이 뭘 하는지 너무 잘 보인다. 하지만 남이 가니까 가는 거와 내가 그 행위 자체가 좋아서 하는 건 다르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다 하고 있기 때문에 바라는 건 want이고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건 like라고 한다. 예전에 김경일 교수가 유튜브에서 한 얘기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 내가 여행을 가는 것이 want가 아닌 like여야 현명한 소비라고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f3oDzks1U4
(0:58부터 want와 like의 차이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