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지만, 오로지 저만 알아보는 폰트를 제작했습니다.
Background
타이포그래피를 만들라고? 당최 왜? 처음에는 대뜸 떨어진 과제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멀쩡히 잘 있는 알파벳을 두고 왜? 하지만 제작하는 과정, 제작하고 나서야 조금 알게 되었어요. 단순히 사용성 여부와 상관없이 타이포그래피라는 것 자체가 어떤 시스테믹 한 과정이자 조형성을 띄는 형태이기에 인문학적인 상상력과 과학적 사고를 모두 움직이는 유기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이죠. 그러한 관점을 스위스 그래픽 디자인에서는 '비주얼 시스템'이라고 하며 20세기 초 스위스 구성주의 디자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성주의에서 비주얼 시스템이란 최소한의 요소로 최대한의 변화를 추구하는 가장 경제적인 디자인 프로세스입니다.
Order is Beauty. 질서는 아름답다.
Plan & Ideation
대뜸 폰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미션에 우선 저는 활자라는 것의 존재 이유를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문자는 어떤 의미일까요? 너무 쉽게 사용하는 이 문자의 출현으로 인류는 최초로 지식을 형태가 있는 방식으로 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역사가 기록되고 예술이 등장하고, 철학을 논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문자는 인류를 사고할 수 있는 개체로서 생명력을 띄게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저는 활자 콘셉트를 제작함에 있어서 [생명, Vitality]를 모티프로 삼았습니다.
컨셉 1. 3차원 이상의 방향을 모두 사용하는 요가 시퀀스인 아쉬탕가를 활용한 타이포그래피
컨셉 2. 물이 얼음이 되는 산소와 수소의 결합구조를 바탕으로 제작한 타이포그래피
컨셉 3. 다양한 언어가 생기기 시작한 바벨탑의 재료인 벽돌의 줄눈의 형태를 계산한 타이포그래피
컨셉 4. 시간의 유한함을 표현하기 위해 도형으로 시각화한 후 기울기의 차이로 변화를 준 타이포그래피
컨셉 5. 나무가 가지와 잎으로 파생되는 과정을 인간의 입모양의 변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타이포그래피
최종적으로는 컨셉 5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동양적인 조형성을 좋아하는터라, 직선형보다 자연물을 활용하여 자연스러운 조형미가 나타나는 것을 선호하는지라 아주 재밌게 고민해볼 수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시스템을 고민한다는 게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경제적으로 용이한 영역까지 계산하고 응용 단계까지 고려하며 디자인으로 구현해야 하는 미션이라 흥미로운 과정이었습니다.
Concept
위에 기획단계에서 언급했다시피 제가 주목한 키워드는 [생명]입니다. 생명이 존재하기까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를 꼽자면 나무가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는 비단 생태학적 이점 외에도 성경과 신화적인 배경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권에서 생명의 근원으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의 경제적 가치로서도 나무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주목한 나무는 만병초 나무입니다.
만병초 나무는 문자 그대로 만병을 치료하는 약초가 자라는 나무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사용법에 따라 독성이 강해 생명의 위협을 줄 수도 있는 나무입니다. 이런 나무의 특성이 언어, 문자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 때문에 남용하다가 큰 위험을 당한 사람들의 모습처럼 언어 역시 섬세하고 귀하게 사용할 때는 그 어떤 것도 치유할 만큼 강한 힘이 되지만 악용할 경우 칼보다 강한 날카로운 상처가 된다는 것이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만병초 나무의 특유의 조형성도 맘에 들었습니다.
Naming
알파벳은 단순히 선과 반원으로 이루어진 도형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여서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면서 존재의 이유가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만들어낸 무에서 유의 과정 안에 충분한 숙고와 명상의 시간을 갖기를 바라는 맘을 담았습니다. 위의 컨셉과도 얼라인 되고요.
System
잎과 다르게 나무 가지는 컷팅이 되어도 바로 죽지 않고 생명력을 지닙니다. 그러한 특성은 활자의 모음의 특성과 같은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아에이오우 역시 자음과 다르게 음절 자체로 소리 나는 문자입니다. 나뭇가지는 모음으로 정하고, 사람의 입모양 중 중설과 전설을 사용하는 a, e, i는 오른쪽에 위치하도록 후설을 사용하는 o, u는 왼쪽에 위치하고 자음은 해당 모음에 상응하는 5가지 글자를 배치한 후, 모음의 선과 반원의 형태를 카운트하여 다양성을 주도록 했습니다.
Alphabet
위의 과정을 통하여 완성된 타이포그래피입니다.
Poster
해당 포스터 작업의 미션은 모든 타이포그래피 알파벳 26자가 포함되어 있을 것, 서체의 네이밍이 명시되어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요구사항을 충족하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만병초 나무 특성이 얇고 기다란 서체이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무의 얼기설기 퍼진 영역을 촬영하고, 어둡게 보정 효과를 준 후 서체를 대비되는 하얀색 컬러를 적용해주었습니다.
3D modeling
보통 3D 작업 후 제작하는 편이지만, 해당 작업은 자연물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여행 과정 중에 미색을 띠는 나무를 보고 조화 시장에서 조형성을 띈 미색의 나뭇가지와 조화 잎을 구하여 페인트칠을 해주었습니다.
Photo shoot
제작 후 자연 모티프로 여러 시안을 잡아보았는데, 도통 다 맘에 들지 않더라고요. 형태를 어렵지만 세워서 정말 자연에서 자라나는 나무, 그러나 백색 인터라 비일상적인 느낌을 주도록 연출하였습니다.
Conclusion
오랜만에 클라이언트가 아닌 교수님 크리틱으로 작업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생각보다 결과가 훌륭하게 나와서 맘에 드는 데다가 상업적이지 않은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라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과 중심이 아닌 작업 진행 과정 중심의 작업은 저의 시야를 좀 더 넓힐 수 있는 데에 도움이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깊이 체감했답니다. 앞으로 상업 작업에도 여러모로 이러한 시야가 언제 어떻게 유용하게 쓰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깊게 집중할 수 있었던 개인 프로젝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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