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신입생이었던 것 같건만 벌써 신입생 모집요강이 뜹니다.
입학 모집요강이 메일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작성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 여기 뭐하는 곳이지?'라는 맘과 '여기 가야 할 것 같아.'의 마음이 무진장 교차했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을 때, 누군가 좀 잘 긁어줬으면 혹은 재학 중인 누군가랑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은 아니겠지만 몇몇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맘을 담았습니다.
우선 저는 오랜 시간 다니던 회사에 조금은 대책 없이 퇴사했습니다. 대부분 퇴사자분들께서는 '회사랑 안 맞아서'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회사랑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어른들과 수더분하게 잘 지내는 편이고 절 잘 모르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저와 일을 한 번이라도 해보신 분들은 다 저와 일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그러다 보니 일의 결과도 재밌게 나올 수 있었고요. 그런데 앞서 저의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창업의 경험이 있다 보니 저를 다시 한번 더 나이 들기 전에 불모지로 내던져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사 내에서 상사들과 임원들의 니즈를 충족하는 것이 아닌 정말 정글과 같은 야생에서 제대로 살아남아서 실력을 기르고 싶기도 했고요.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TANGIBLE 한 것이요. 마침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인풋을 위한 액션의 리스트를 정리했고, 그중에 하나가 나를 좀 더 성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고정 스케줄인 대학원을 병행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탠저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만나는 사람마다 묻고 다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친한 평론가 분이 '박효신 교수님'수업을 학부 때 들었는데 교수님께서 맨날 하시던 말씀이 tangible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라고 말해주시더라고요. 찾아보니 박효신 교수님이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에 교수님으로 계셨습니다. 하지만 전공명이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라는 점이 멈칫했습니다. 나 디자인 전공자도 아닌데, 공부를 한다면 광고홍보나 MBA 가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우선 메일을 보냈습니다. 비디자인 전공자이며, 디자이너보다는 기획자로 살아왔고 앞으로 그러할 것인데 해당 전공이 적합할는지 여쭤보았습니다. 회신을 받고 '그래 어디든 나하기 나름이지. 그리고 기획자로서 애초에 어느 정도 디자인 스킬을 더 디벨롭해서 모든 프로세스를 다루고 싶었으니까.' 생각에 도달합니다. 동시에 대학원을 단순히 석사 학위가 아닌 정말 제 향후 미래에 도움되는 깊이를 기르는 학습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 참고로 기획자로서 왜 디자인 대학원을 고려했냐는 다른 이유를 답하자면 저는 기획/마케팅을 해오면서 결국엔 5년 전만에도 수치적인 경영전략가가 더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현재에는 경영이든 기획이든 마케팅이든 모두 디자인 바탕의 사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맞다! 막상 여기 지원하려고 하니까, 주변에서 경쟁률 높다고 다른 곳도 알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차 싶어서 알아봤더니 이미 비슷한 전공의 대학원들은 접수 마감. 뭐 될거면 되겠지 우선 최선다하자 마인드로 지원했습니다. 생각보다 경쟁률이 높아서 약간 많이 놀랐고, 주변에서 '저 분이 왜?'싶은 분들이 서류 떨어지셨다고 하여서 좀 움찔했었던 것 같긴해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전공은 포트폴리오가 필수입니다. 하지만 저는 말씀드렸다시피 디자인 전공자가 아닙니다. 저는 사회학과 국제통상학을 전공했습니다. 정말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패션 쪽 업무 경력이 있었습니다. 디자인을 직접 하는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디자이너에게 기획의도와 기획 방향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결과를 디자인에 풀어내도록 가이드를 주는 기획자 포지션으로 회사와 프리랜서로 근무한 경험이 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과거에는 '디자인 제작'에 포커싱이 되어 있었지만, 이 곳은 디자인 싱킹에 조금 더 집중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1학기 동안 실물 과제를 하면서 느낀 부분도 동일합니다. 단순히 '제작'보단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인지 더 집중하시는 교수님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분명한 의도가 있으면 뚜렷한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더라고요. 오히려 학부 때 디자인 전공한 분들에 비해 초반에는 조금 더디게 작업했지만 결과물은 더 빠르고 정확하게 도출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곳에 와서 디자이너와 기획자가 어떻게 다른지 좀 더 체감하고 있는데, 두 성향의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쓰다 보니 서두가 길어졌네요. 다시 돌아가면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 기획자이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의 포트폴리오처럼 멋지고 깔끔하진 못했습니다. 전체 포트폴리오를 공개적으로 다 보여드리기엔 다시 돌아보니 너무 부끄러워서 일부 참고할 수 있는 페이지만 업데이트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이미지는 제가 재직하던 패션 유통사 브랜드 통합 IMC 전략 프로젝트의 프로세스를 작성한 포트폴리오 페이지입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어떻게 진행했는지 간략한 이미지와 도표로 프로젝트 프로세스별로 1~2장씩 요약해서 제가 기획한 대표 프로젝트별로 8페이지씩 만들어서 작성했습니다.
디자이너 아니라면서요? 저 페이지는 어떻게 만들었어요?라고 하신다면 단호하게 전 모두 파워포인트로 만들었습니다. 입학하고 교수님도 말씀하시지만, 디자인은 스킬이 아니라 감각이라며. (그렇다고 제가 감각이 음층 좋다는 건 아니고요 허허.....)
또 다른 예를 들면 브랜드 론칭 전략은 이렇게 2년간 운영했으며, 기획한 상품 이미지의 컬렉션 보드를 첨부 하고 보여드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 보면 뭔가 아쉬운 게 많아서 부끄럽긴 하네요.
사실 포트폴리오라는 것이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 회사에서 장표를 만들죠? 그것도 어떻게 보면 포트폴리오입니다. 다만 조금 숫자 성과 위주의 장표를 디자인적으로 유의미한 관점으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합니다.
다시 제가 작성한 학업계획서를 살펴보니, 디자이너 관련된 워딩보다 현사회 살고 있는 일원으로서 나의 태도와 비주얼 라이징 작업을 해왔으며, 브랜딩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한다라는 의지를 담았네요. 저는 '디자인'이라는 키워드보다 '브랜드'와 '커뮤니케이션'키워드를 훨씬 강조하여 작성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부 때 사회학을 전공한 것이 거시적이고 세상을 관찰자 시선에서 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적 아비투스의 해체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브랜드 전문가 되기 위한 포부를 경력과 함께 녹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모든 글을 길게 쓰려고 하지 않고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만 요약해서 작성한 것 같습니다.
면접은 코로나 사태 이전이라 전공별로 모두 대면해서 진행했습니다. 이번 학기 신입생은 어떨런지 모르겠네요. 담당 주임교수님 2분과 저 한 명 2:1 면접이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순서였고, 전혀 딱딱한 분위기 아녔습니다. 제가 퇴사했다는 것에 놀라셨으며 어떤 일을 해왔고 왜 왔는지 질문하셨던 것 같습니다. 5분 정도 짧게 웃으며 끝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긴장을 잘 안 하는 성향인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공부하러 내 돈 내고 오겠다는데, 제대로 잘 가르쳐주실 거죠? 이런 맘도 좀 있었고요.
확실히 우리가 첨단사회에 사는 것 같네요. 모든 강의가 사이버 강의이고 발표도 진행합니다. 모델링도 하고요. 뭐 처음엔 좀 아쉬웠지만 지금은 그 나름대로 개인 프로젝트와 외주작업도 진행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이군 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별도로 대학원 학비에 대한 언급은 아쉽게도 없네요. 도서관과 교수님의 신랄한 피드백을 직접적으로 받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저는 교수님들과 메일로 적극 소통하고 있습니다. 항상 혼자 알아가야 하는 포지션에 있다가, 조그만 거라도 고민되는 것 궁금한 것을 마구마구 물어보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지식인의 존재가 가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리고 디자이너가 아니다보니 교수님들이 되게 우쭈쭈 많이해주셨어요. 그게 되게 힘이 되었음!
사이버강의라서 일까요? 저는 얼추 진행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논문 쓰는 3학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요. 완전 주간 타임의 근무라면 어렵겠지만, 프리랜서나 기획업무는 틈틈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이 워킹 아워가 아닌 유동적인 워킹 아워의 작업이라면 병행이 아예 어려운 것 같진 않아요. 물론 저도 매번 균형을 잘 잡으려고 적지 않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능하다고 하는 이유는 저는 학업 가운데서도 일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 위주로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학업을 임하는 자세도 최대한 이 곳에서 나의 깊이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효율적으로 과제나 스터디하려고 노력해요. 하나 포인트에 과하게 집착하기보단 과제 하나가 주어졌을 때 전체적인 타임스케줄을 대략 고민하고 불가능할 것 같은 부분은 과감하게 방향을 돌려서 단순하되 좋은 아웃풋이 나올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어후, 왠지 되게 잘난척하는 것 같은데 그냥 제가 요령을 파악한다는 뜻.)그리고 회사 다니면서 PM업무를 해오다 보니까 이것저것 다 손을 직접 대야 했어서, 잔잔바리로 할 줄 아는 게 은근히 도움되더라고요. 허허.
입학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졸업생이 아닌 터라, 졸업 후 진로나 방향은 뭐라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네요. 교류적인 면에서도 코로나 때문에 교류다운 교류를 못해서 잘 모르겠고요. 혹시 제가 쓴 글 바탕으로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여쭤봐 주세요! 무언가 대학원도 새로운 도전이실 텐데, 도전은 언제나 멋진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