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의 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지 Jan 11. 2019

무식해서 용감했던 어느 날의 창업기 (중)

기적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나는 여전히 19살이었고 부모님은 나를 그저 적당한 수준으로 공부하는 아이라고만 생각하고 계셨다. 가끔 엄카에 맥도날*가 20만 원어치 찍혀있는 걸 보고 의아해하셨지만, 그래도 매번 그럴싸한 핑계로 넘어갔다. 에디션 4가 끝나자 이젠 진짜 모인 돈으로 액션을 취해야 할 때가 왔다.






먼저, 수익과 관련된 기준을 만들었다.


수익금을 모두 기부하는 서적들이 판매와 동시에  홍보되면서, 동시에 함께 봉사하겠다는 회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국에 5,000명 정도가 모였다. 전국구에 모이다 보니 예전처럼 봉사를 가는 것이 쉽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수익금을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수익금의 사용방법


 1.5/10 : 회원들과 일을 도모하는 데에 사용하자.

 8.5/10 : 정말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하자.



굳이 비율을 저렇게 세팅한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저 정도 되어야 무언가 도움이 되는 큰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회원수가 늘어나자 의미 있게 돈을 사용하라며 일부 교회나 단체로부터 후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 인생 18년인 (여기서 교회를 비방하고 자는 의지는 단 하나도 없다. 난 크리스천인 것이 자랑스럽다. 다만, 교회라는 곳의 이면을 안타깝게도 많이 봐왔을 뿐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후원의 비중이 커지다 보면, 우리의 색깔이 흐려질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돈은 무섭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후원이란 금액이 적을 때만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특히 정치집단의 지원은 한 푼도 받지 않기로 했다. 아낌없는 후원은 감사하지만, 후원해준다고 무턱대고 덥석 받았을 경우 여기까지 있게 한 회원들을 욕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원의 기준을 세웠다.



후원의 기준 


첫 후원자의 경우, 30만 원 이상 후원을 받지 않는다.

후원의 조건이 발생할 경우, 1원도 후원받지 않는다. 우리가 봉사를 하는 단체인만큼, 회원수가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특히 정치색깔이 있는 단체의 후원은 극도로 주의하여 살피거나 받지 않는다.

금액보다는 현물 후원을 권장하자. (ex. 봉사 갈 때, 간식 후원. 캠프 시, 티셔츠 제작 후원)




자, 이제 기준을 세웠으니, 행동을 해야 될 시점이 되었다.





모두 함께 사회적 안전망의 그늘을 찾아헤매기 시작했다.


원래의 취지대로 봉사를 조금 더 전국구로 돌아다니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지역별로 8개 지부를 세우고, 미혼모/노숙인/치매노인/보육원 중심으로 봉사를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마련했다. 기왕이면 많이 돕는 곳보단 정말 정부의 복지 제도권 사이에 혜택을 받지 못하는 틈새층을 찾아다니도록 가이드했으며, 학생들이기에 그에 따른 봉사시간이 지급되도록 각 지역별 동사무소와 컨택하여 절차를 만들어갔다.


매주 서울역, 미혼모센터,보육원 등 각지에 흩어져 봉사를 했다.




하지만 지역구로 운영하다 보면, 내부적인 네트워킹만 있을 것이고 함께 모여서 무언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수용 가능인원이 50인승 버스 2대 정도라고 생각해서, 100명으로 한정을 짓고 매년 봉사캠프를 4년간 진행하기 시작한다. 정말 이 캠프를 위해 장장 3개월가량 준비를 해왔는데, 지금 돌아보니 믿을 것 하나 없는 나라는 사람을 믿고 따라준 아이들이 무척 고맙다. (사실 사진을 찾아보면서 뭉클해져 버렸다.)




09년도부터 매년 전국의 100명이 모여 1박2일 봉사캠프를 떠났다.


정말 필요한 곳, 의미 있는 곳을 찾아서


우리가 학생들이 모인 만큼 우리와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제3세계 교육 쪽에 기부하는 것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큰 업체에 컨택을 하면 오히려 이슈도 되고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창업가'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많은 곳에 후원을 받고 있는 단체에게 기부금 형태로 전달하는 것은 너무 안일한 선택, 우리 답지 않았다. 이때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생각보다 어머니는 덤덤하셨다. 다만, 제3세계의 후원을 하시는 분들을 소개해주셨을 뿐.


다행히 어머니가 소개해주신 덕분에 함부로 대하는 분들이 많진 않았지만, 교복 입은 학생이 제3세계에 후원하거나 사역하는 기구의 직원들을 만나면 그들은 의외로 심드렁했다. 그렇지 않다면, 과도하게 관심을 보였지만 사용하는 방향에 대해 미심쩍은 요소가 많았다. 그러다 우연히 한 선교사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탄자니아에서 오랜 시간 선교하시는 여성 선교사님이셨다. 10년 넘도록 그곳에서 봉사하고 계시는데, 이제 너무 힘들어 귀국할 예정이라는 이야기였다. 촉이 왔다. 왠지 이 분이라면 사명감을 이해하시리라.




혹시 그분께 메일 한 통을 써봐도 될까요?


촉뿐만 아니라, 여러 기관을 통해 알아본 바로도 그녀는 오지에서 오랜 기간 성실하게 사역을 하며 헌신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후원해주는 곳 역시 정말 작은 지역구 교회에서 알음알음 모은 예산으로 생활하시며, 탄자니아 마사이족 아이들을 교육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으신 분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은 아닐 수 있지만, 메일을 주고받는 끝에  이 곳이 우리가 찾아 헤매던 의미 있는 곳이자 필요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렵사리 그녀에게 후원과 관련된 의지를 피력했다.


그녀의 메일은 담백했다. 하지만 건너들은 바는 감동적이었다. 선교사님은 홀로 이 곳에 생활하며 심신이 많이 지쳐 더 이상 사역을 못하겠다는 마음을 다잡은 상태에 내가 연락이 왔으며, 대화 끝내 내가 고3이고 모금을 만든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라는 점에 무척 놀랐다고. 그리고 당신이 이 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 이들에게 봉사해야 할 이유를 다시금 깨닫고 힘을 얻었다고 지역구 작은 교회를 통해 건너 들었다.



후원한 탄자니아의 마사이족 아이들의 학교. 창문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학교라는 공간만으로 희망을 찾는다고 했다.



선교사님의 편지를 전달하면서, 우리는 매일 감동의 나날들을 보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도 함께.

의미 있게 사용하고자 했던 수익금은 이 곳 저곳 사용하며 줄어들었지만, 왠지 결국 또 채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전 세계 충격을 가져다준 강진이 일어났다. 아이티에서 강진이 발생한 것이다. 300만 명이 사망하고,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고, 집을 잃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금액은 정말 적었지만 그때부턴 우리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모금활동을 시작했다. 외부로도 나가서 설명하고, 회원들이 120원부터 십시일반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모아지는 금액이 크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폐허 속 새로이 건축되는 고아원에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페인트칠 비용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금액이 모였다.


OECB (Orphelinat de l' Eglise do la Comprehension de la Bible) 페인트 봉사




놀랍게도 2년 내에 이 모든 과정과 결과를 이루었다. 무언가를 의미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은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함께하는 아이들 모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넓어졌으며, 삶의 목적이자 학생의 신분으로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저마다 발견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기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디엔가 계속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무식해서 용감했던 어느 날의 창업기 (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