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의 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지 Jan 11. 2019

무식해서 용감했던 어느 날의 창업기 (상)

기획자가 되기 전, 나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창업가였다.  


왜 회사에 들어온 거야?



나의 창업기를 들은 사람들이면 꼭 이렇게 질문을 한다. 사실 나도 그 시기의 내가 그립다. 한때 나는 정말 <창업가 정신> 서적 나올 만큼, 세상에 무언가 변화시키는 데에 일조하고 싶은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업가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유학생, 입시제도를 만나다.


중학교 1학년, 늦둥이 딸에게 독립심, 생활력(?)을 길러준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나를 중국으로 유학 보내셨다. 그리고 4년 뒤 부모님은 결국 한국에 돌아오라며 두 손을 들었다. 독립심이고 자시고 막내딸이 너무 걱정되고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4년이면 꽤 오래 견디신 거라고 생각하고, 4년이기에 그래도 어디 가서 중국에 대해 좀 안다고 하거나, 내 또래의 중국인들과 학창 시절을 논하면서 제법 그럴싸한 라포를 형성할 수 있으며, 중국어는 편해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점에 안도하고 있다.


내가 외국에서 태어나고 쭉 자라 우리의 보편적인 교육시스템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은 아니지만, 원래 어중간하게 다녀온 애들이 더 유난 떤다고 하지 않은가? 한국에서 다니는 고등학교 생활에서 나는 갈피를 못 잡고 몇 개월을 지나보냈다. 입시제도를 무작정 비판할 생각은 없다. 이 제도를 비판할 정도로 지식도 없을뿐더러 피해를 봤다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생겨먹은 게 문제인 건지 계속 "왜 저렇게 공부해야만 해?"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학생의 본분이고 자시고, 목적의식 없는 행동은 할 수 없는 괴짜인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꾸준히 묵묵히 공부해온 사람들을 무척 존경하는 바이다. 또한 이런 나의 성격이 기획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지만)




불현듯, 내가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당시 적절한 핑계거리와 함께 삐딱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이도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무언가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명감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왜?'에서 시작했는데, '왜 나는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유학도 다녀와보았고, 다양한 환경에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이 노출되었고 그래서 제법 괜찮은 안목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상당히 뜬금없는 전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고 자란 것을 사회에 기여해야겠다는 마음도 함께 솟아났다. 그리고 뭣도 모르겠지만 UN 국제기구에 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뭔가 사회를 위해 일을 할 것만 같은 직업군이었고 멋있어 보였다. 그래, 돌아보면 난 그때부터 공부란 걸 하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나의 성격이 급하단 것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UN에 가서 기아 대책안을 만들고, 교육의 기회를 주고 뭐 그래야 하는데 나는 아직 자리에 앉아서 공부만 해야 되는 게 싫었다. 한마디로 어디서 본 것 많은데, 무식한 사람이었다. 나의 사명감은 활활 타오르다 못해 신앙심과 만나기까지 하면서 24시간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였다. 무작정 동네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 뭔가 해야 해. 주변에 봉사라도 좀 다녀보자."


처음엔 동사무소에 찾아가 기왕이면 유명한 복지재단 말고, 도움이 필요한 개별 가정에 방문하고 싶다고 하며 리스트를 전달해줄 수 있냐고 했다. 처음엔 '뭐지 이 친구는?'하고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동사무소 직원이 결국엔 내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보곤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모았다. 꾸준히 봉사를 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 열정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한국에 작은 '봉사기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당시에 내가 무슨 생각의 흐름으로 이 모든 상황을 지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뭔가 내가 모르는 내재된 자아가 제멋대로 생각하고 움직인 것만 같다. 그래서 내가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의도건 뭐건 무언가를 사고가 미친 듯이 지나가는 순간을 되돌아보면 분명 내 영역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분명 신이 도왔다. 신이 나를 어여삐 본 게 확실하다.




함께 할 사람은 있어도, 돈이 없으니 굴러갈 길이 없을 수밖에.


뜬금없이 다음(Daum) 카페에 봉사단체를 하나 만들었다. 친구들로는 회원수도 너무 작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내가 당시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팬들에게 홍보를 했다. 오빠들을 계기로 만나서 봉사하자는 의미가 제법 많은 팬들에게 어필이 되었는지, 전국에 내 또래 아이들이 무수히 많이 가입하기 시작했다. 운 좋게 회원들은 모였는데, 돈이 없었다. 돈 버는 법을 알지도 못했고, 부모님께 무언가 도움을 구하자니 아무리 이해심 깊은 부모님이라고 하셔도, 고2 딸이 도대체 뭐 하는 거냐 라고 헛소리 말라하실 거는 안 봐도 훤했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나 팬들이 우리 오빠들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지는 기똥차게 알아.' 자신 있는 것이 그것뿐이어서,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그려진 서적들을 제작하여 팔아보자고 결심했다.



오빠(?)들을 스토리로 엮어 만든 책들을 기획하고, 디자인해서, 출판하여 판매했다.



중학교 때, 인기를 휩쓸었던 시대의 인물 반윤희의 필터를 따라 한다고 알음알음 배운 포토샵들이 이렇게 요긴할 수가! 오빠들이 그려진 다이어리부터 하나씩 디자인하여 판매를 했다. 이 후에는, 디자인 영역에서는 조금씩 도움을 얻어 조금 더 그럴싸한 서적들을 기획했다. 판매가 완료되고 나면, 친구들과 3개월에 한 번씩 을지로 2가 한 인쇄소에 사장님 배려로 제공해주신 작은 방에 하교하고 모여, 열심히 책을 포장해서 택배 보냈다. 6명이 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포장해도 부족할 정도로는 팔린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몇 권의 책을 발행했더니, 통장에 내가 본 적이 없는 돈이 찍혀있었다. 사실 지금 회사원인 내가 봐도 큰돈이다. 한 번 발행할 때마다, 내가 기획자로서 현재 몇 달을 뼈 빠지게 일해야 버는 돈이 순익으로 남았으니 말이다.




에디션2의 구름박스로 배송하던 시기. 이때쯤부터는 친구들과  택배포장의 달인이 되었다.




자본금 0원으로, 수익내기.


여기서 잠깐. 도대체 엄마 몰래 한 거면,  자본금이 어디서 난 거야?라고 묻는 사람이 제일 많다. 우선 나는 그 정도로 엄청나게 똑똑한 고등학생은 아니었다. 뚜렷한 사업모델이나, 수익구조를 생각한 것도 아니다. 우선 돈이 으니, 어렴풋이 '이런 걸 팔 테니까, 구매하실래요? 다만 며칠만 좀 기다려주세요. 이 단가 나올 때까지 사람이 모이면 바로 진행할게요!'라고 제안하면 어떨까 싶었달까. 나름 명칭을 '가예약'이라고 정하고 홍보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크라우드 펀딩과 그 형태가 아주 유사하다. 그 당시는 그런 구매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없었을 텐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오빠들' 덕분이었던 '언니들' 덕분이든 구매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 아니면 이 판매하고 발생하는 모든 수익금을 의미있는 곳에 사용하겠다는 의지치를 높이 봐주시고 인내해주셨으리라고도 생각한다. 에디션(Edition)형태로 미리 상품 디자인, 시안 및 콘셉트를 공개하고 인쇄소와 협의 후, 수량 대비 단가를 정했다. 대략 예측되는 수량을 바탕으로 단가를 세팅하고 홍보한 후, 미리 입금을 받는 가예약 형태인 분들에게는 선물을 추가로 제작했고, 그러고 남은 소량의 재고를 구매한 구매자에게는 가예약보다 +1,000원 정도 추가해서 판매하였다. 이 과정을 보면 크라우드 펀딩 형태가 스타트업에게 분명 너무 좋은 플랫폼이라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 아무것도 없는 고등학생이 아이디어와 기획안으로 돈을 벌 수 있었으니까. 여하튼 당시 구매고객님들, 지금도 매우 감사합니다.



에디션 3에서는 나름 상세페이지로 미리 안내하기 시작했다. 제법 구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돈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어려운 시기인 고등학생이었다.  


여담이지만, 지금 그 돈을 벌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더 크게 확장을 할 수도 있고 또 더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투자했겠지만, 또 아는 게 많아진만큼 본 의도와 다른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명확했다. 만져본 적 없는 큰돈이었고, 그랬기에 이건 나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고, 나와 친구들의 수고비나 기타로 취해야 할 이익 같은 것은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진짜 나쁜 사람이네, 열정 페이의 끝판왕이었네... 하지만 우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번 돈으로 친구들 밥 사줄 법도 한데, 엄카를 열심히 긁어서 맛있는 걸 사주었다. ) 이때부터 나는 돈을 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쓰는 것을 고민했다. 그게 어쩌면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미드센츄리모던, 바우하우스에 열광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