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바로 설 때

미끄럼 주의

by 한아르미


오늘은 아침에 눈이 조금 일찍 떠졌다.

거실에 마련한 작은 책상에 앉아,

스무날 만에 감사일기를 썼다.

몇 년을 꾸준히 쓰다가

마음이 힘들어지면 내려놓게 되는 루틴이다.

감사일기를 쓰면 마음이 다독여진다는 걸 알기에

내게 가장 중요한 아침 습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위로가 가장 필요할 때는

그 노트를 마주 앉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한 바닥을 끝까지 채웠다.

그걸로 스스로에게 작은 진단을 내렸다.

아, 조금은 회복되고 있구나.


어제 점심에도 산책을 나갔다.

비가 오다 말고

톡톡, 토도독—

진눈깨비인지 우박인지 모를 소리가

잠시 요란하게 지나갔다.


그래도 길은 늘 걷던 그 길이었다.

미끄럼 주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적힌 여러 언어가

이상하게도 친절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 저 표지판 아래에

미끄러져 앉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툭툭 털고 일어나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될 텐데,

갑작스러운 충격에

조금 많이 놀랐던 건 아닐까.


지쳐서 주저앉은 게 아니라

그냥 잠시 미끄러진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끄럼 주의’라는 말이

주의하지 않은 내 탓 같기도 하고,

우리는 이미 경고했다는

책임 회피처럼 느껴져

야속하고 얄밉게 보이기도 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은

비도, 눈도, 우박도

할 수 있는 건 전부 쏟아내는 것 같았다.


그 검은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해인지, 달인지,

아니면 멀리 있는 가로등인지 모르겠지만

그 빛을 알아본 내가

조금 기특해서 또 한 번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냥 지나치던 빨간 열매도

펜으로 한 번 그려보고 싶어

사진첩에 담았다.


요즘은 걷는 동안

다리보다 머리가 더 바쁘다.

생각을 정리했다가 덜어내고,

나를 다독였다가 위로했다가,

기억도 남기고 사진도 남긴다.


미리 조율돼 있던 회식 자리에

“집에 일이 있어 가봐야 한다”는

형식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반숙 달걀 하나와

양배추쌈에 불고기 몇 점을 싸 먹고

무기력하게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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