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송 Nov 17. 2019

송이치킨

1988~2001


   1988년. 내가 태어나던 해에 우리 집은 치킨 집을 시작했다. 옛 간판 '민희 상회, 미화 이발'처럼 치킨 집 이름은 셋째 딸의 세 번째 글자를 따서 '송이치킨'이 되었다.  뜨거운 증기로 신선한 닭을 기름지게 튀겨내는 그곳은 내 놀이터였고 식사할 수 있는 식탁이었으며, 주말 오전을 보내는 아지트이기도 했다. 비닐로 된 주황색 쿠션 의자 여러 개를 붙이면 커다란 침대가 되고, 의자를 떼어 일렬로 세우면 의자 아래 상상의 악어가 드글거리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치킨 포장과 동봉되는 무를 먹으려고 치킨을 먹는 사람이 그때도 있었는데, 당시 프랜차이즈가 아니었던 우리 치킨집은 엄마가 1주일에 한번씩 무 장아찌를 직접 담그셨다. 뚜껑이 있는 커다란 고무통에 깍둑 썰은 무를 담고 소금에 절이고 식초를 붓고 설탕을 넣고. 여느 맛집에도 있는 사장님의 비밀 무기를 몇 가지 더 넣으면,  치킨무만 따로 판매하시면 안 되냐는 소비자가 생겨날 정도의 고객만족도와 충성도가 높은 치킨무가 완성되었다. 지금처럼 세련된 플라스틱 용기가 그때는 없어서, 남대문 시장에서 사 온 기다란 줄 봉투를 크기별로 잘라, 앞 뒤 꼬다리를 묶고,  치킨무를 담아 포장하는 것은 우리 세 자매의 몫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치킨 포장상자를 접는 일도 우리의 몫이었다. 한 장으로 펼쳐진 종이의 눈금 따라 요기조기를 눌러 접고 나면 상자가 완성. 누가 더 빨리 접나 내기를 하기도 하고, 한 개를 접을 때마다 50원씩 받아, 용돈을 두둑이 벌기도 하고. 하도 접어서인지 초등학교 4학년 수학 교과에 나오는 도형과 전개도를, 나는 잘했다. 이 외에도 손님이 떠난 자리를 정돈하거나, 가게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일, 콜라와 사이다병을 한 줄로 세우는 일, 12평 남짓 작은 치킨가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부부와 세 자매가 열심히 손을 더했더랬다.  


  지금 생각했을 때, 가장  얼굴이 달아오르는 일은 배달이다.  간혹 가다가 엄마는 내게 치킨 배달을 시키기도 했다. 초등학교 1-2학년부터 시작된 나의 치킨 배달은 고학년으로 갈수록 그 직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퇴직을 했는데, 여하튼 나는 송이치킨의 충실한 직원이었다. 친구네 집으로 배달을 가던 8살 소녀를 생각해보시라. 지금 생각하면 눈이 절로 감기지만,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한 겨울, 배달 간 친구네 엄마가 같이 먹고 가라고 하셔서 먹고 왔을 뿐인데. 그걸 먹고 오면 어떡하냐고 엄마한테 쓴소리를 듣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배달사원이 배달 가지고 온 음식을 같이 먹은 격이니, 그때의 내가 너무나.. 대단한 것 같다. (어떻게 그런 뻔뻔함을 장착했을까, 아마 그때의 덩치와 식습관대로라면 적은 양을 먹지도 않았을 거다. 친구보다 더 많이 먹지 않았을까)

 

▲ 치킨집 뒷 계단, 송이의 두 언니들 

  

한 번은 치킨집 뒷마당 주차장에서 놀다가 깨진 콜라병에 다리를 찢겼다. 줄줄 흐르는 피보다도 엄마 아빠한테 혼날까 싶어, 어린 마음에 언니에게 비밀리에 휴지를 가져오라고 시켰다.(건방짐이 6살부터 시작된 것 같다) 계속해서 멈추지 않는 피에 휴지를 더 가져오라고 주문하자.. 휴지를 한 움큼 쥐어오는 언니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아빠가 휴지 왜 그렇게 많이 가져가냐고, 뭐라고 했어~ 아빠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아” 하자.. 임기응변이 뛰어난 6살 어린이는 “나 지금 똥 싼다고 해” 로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리하여 그때 당시의 봉합기술보다 더 매끈한 상처를 무릎 정강이에 지니게 되었다. 영광의 상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것은 내 유년시절에 소지하였던 임기응변의 흔적인 것이다. 




  매년 초 겨울이면 아빠가 가스난로를 꺼내곤 하셨는데, 불을 붙일 때 나는 약간의 비릿하고 역겨운 가스냄새가 이내 사방으로 흩어져야만 공기가 데워졌다. 아빠는 종종 난로의 상단에 있는 그릴에 가래떡이나 절편을, 밤과 고구마에  칼집을 내어 구워주셨는데, 눈놀이를 하고 돌아와 먹는 그 뜨끈하고 쫄깃한 가래떡이 어찌나 맛있던 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겉면은 얕게 딱딱한데, 그 뜨거운 것을 한입 깨무는 순간 치즈처럼 주욱 늘어나는 뽀얀 속살, 쩝쩝거리며 먹고 있노라면 아빠는 올려두었던 군밤을 까 주었다. 고소한 가래떡을 먹고, 포실하게 달큼한 군밤을 먹으면.. 어느새 손발이 녹고 마음까지 포슬거렸다. 


  배달을 다녀온 아빠의 품속에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붕어빵. 따뜻함이 새어 날 까 싶어 봉투 입구를 꽉 막아 조금은 눅진해진 그것들을 우리는 와구와구 먹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도 길거리의 붕어빵 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때 먹었던 그 맛 때문이다. 이제는 그 맛이 나지 않는데도 주머니 속에 현금을 찾아 매번 사 먹고는 한다. 


  단체주문이 들어와 엄마 아빠가 밤새 기름진 냄새를 맡아야 하는 날에는, 부모님의 수고로움에 걱정보다 장사가 잘되는 것에 더 기쁘던 시절. 주말이면 세 자매가 손을 잡고 나들이 다니던 시절. 일주일에 한 번은 깨끗한 새 기름에 갓 튀겨낸 통닭을 먹던 시절. 20년도 더 된 그때가 아스라이 올라오는 지금은 11월, 아빠가 하늘나라로 간 지 아홉 번째가 되는 해.


▲ 송이치킨집 셋째 딸, 송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