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송 Jun 13. 2019

삼자매 휴전기


  자매는 그런다. 하나의 옷을 놓고 목숨을 건다. 내 옷은 내 옷이고, 같이 산 옷은 당연 내 옷이며, 니 옷도 목숨 걸고 내 옷이 된다. 외출 전날 머릿속에 구상해놓은 코디를 고스란히 실현하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하고, 생명의 부지를 위해서는 새벽같이 일어나 쥐도 새도 모르게 준비하여야 한다. 당연 머리는 밤에 감고 잔다. 화장은 나가서 한다. 그러면 정확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들의 근엄한 호명이 들리고, 호명이 들리면 그저 부리나케 뛰면 된다. 전화는 36통이 울려도 받지 않아야 하며, 문자메시지 테러가 올 수 있으니 잠시 무음으로 해두셔도 좋습니다.


  자매가 있어서 여러 가지 좋은 점들 중 하나는 운동신경이 늘 수밖에 없다는 거다.  태권도는 굳이 배우지 않아도 발차기 실력이 좋아진다. 체구가 작은 두 언니들에 비해 지나치게 튼튼하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두 언니를 거뜬히 무찔렀다.(?) 난 공격하려던 게 아니라, 다가오는 언니들의 공격에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야. 정당방어에 나가떨어진 언니들은 악에 받치며 달려들었고, 방어 후 안방으로 달려가 엄마가 올 때까지 나는 그 방에서 안 나왔다.  박살 낼 기세의 발차기에도 문은 부서지지가 않더라.


  2살, 3살 터울인 언니들에게 애교 따윈 먹히지 않았다. 동생이라고 봐주는 것 없고, 언니라고 배려가 없었다. 철저한 더치페이의 사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주어야 했던, 세 소녀는 서로에게 생존을 체득케 했다. 지금 와서도 스스로 이상한 점은 언니들을 부를 때, 성씨를 붙여서 이름을 부르고 그 뒤에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거다. 길어서 불편했을 법도 한데, '엄소령 언니', '엄미령 언니' 이 긴 호칭을 나는 항상 부르곤 했다. (이따금씩 '언니' 생략 가능) 그렇게 우리는 위엄 있는 관계를 유지했다.


 처음 언니들이 언니들 답지 않게 다정하다고 느꼈던 것은 나의 스무 살, 성년의 날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당시 남자 친구이자 현재의 남편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꽃과 반지를 준비한 남자 친구와 한창을 놀고 있다가 12시가 넘어 들어가니, 화가 난 엄마가 반지 박스를... 성난 목소리로 주셨다. 엄마가 성년의 날이라고 반지를 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두 언니들의 그 날에는 다 같이 소고기 파티를 했는데. 이것은 엄마가 주셨지만, 분명  언니들의 머리로부터 나온 제안 이리라. 처음은 아니었겠지만, 그날  언니들에게 다정함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다. (물론 그날 언니들한테 욕을 실컷 먹었다. 장수 신기록 세울 수 있을 만큼)


  그다음의 '다정'은 나의 결혼과 임신이었다.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겠다는 소식에 가족 모두가 울었다. 방에 들어 누우신 엄마와 침묵하시던 아빠의 사이에서 언니들은 나에게 평안을 주었다. 그리고 언니들은 새벽기도를 가자고 했고, 죽을 때까지 나의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될 거라고 했다.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렇게 10년이다. 10년이 된 지금까지, 언니들은 내 아들, 딸의 여러 이벤트에 동참하여 나 혼자 살아내야 하는 육아를 같이 살 아내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대기업에 다니던 둘째 형부가 임용을 준비하겠다며 사표를 냈다. 1년 준비해서 떨어지더니, 두 번째 시험에서는 전국 모의고사 1등을 하며.. 바로 합격의 소식을 전했다. 서울살이가 답답하다며 통영으로 간 언니네 부부는, 결혼한 지 7년 만에 임신을 했다. 그 소식이 얼마나 기쁘던지, 내 자식을 품게 되었을 때도 그렇게 안 울었는데 참으로 신기하더라. 언니는 입덧을 한다고 했다. 엄마도, 나도 안 해봐서 얼마나 괴로운 지 모르는 그 입덧을 언니가 한다니. 치약 냄새도, 음식 냄새도 모두 모두 싫은데 잠까지 설친다던 언니가 걱정돼 서울 가족이 모두 통영으로 내려갔다.


  작은 빌라에 살다가 커다란 아파트의 안방마님이 된 언니는 밥이며 고기며, 생선, 과일, 간식 가릴 것 없이 잘만 먹더라. 집에 손님 초대해놓고 제일 늦게 일어나고, 가만히 있는 형부한테 왜 가만히 있냐고 타박을 주는 언니에게 나는 "언니 입덧 아니야, 입덧 뭔지 모르는 거 같은데, 언니는 입덧 아니고 허언증이야" 이라며 장난스레 일침을 가했다. 그 말에 언니는 조금 민망하고 쑥스러운 얼굴로


나 입덧이 아니라 우울증이었나 봐

라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이 또  마음에 박혀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2박 3일을 꼬박, 같이 먹고 놀다가 헤어지던 시장 골목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딸아이에게 말했다.  "민서야~ 봐봐라. 이제 할머니 운다? " 내뱉자마자 뒤로 돌아서 한참을 서 계시던 엄마, 그리고 연이어 선글라스 속으로 손을 넣던 언니들, 먼저 입 밖으로 꺼낸 주제에 소리까지 내어 울던 나.


  이제는 안정기에 접어들어 다시 서울에 와 있는 언니가 내일 즈그 집에 간단다. 한 2주 있다 갈 줄 알았는데, 꼴랑 5일 있다가 슉 가버린다 하여 마음이 또 싱숭생숭하다. 내가 아침도 차려주고, 설거지도 해주고 햇볕을 담은 이부자리도 챙겨줄 수 있는데. 질 좋은 음식을 담아낸 식탁으로 삼시 세끼 포동포동 찌워줄 수 있는데. 약속 장소로 셔틀 기사도 야무지게 잘하며, 손하나 까딱 안 하는 삶을 한 달까지 살게 해 줄 수 있는데 언니는 가 버린단다.

▲ 사랑하는 나의 2호님, 까꿍이 엄마


  내가 언제부터 언니를 이렇게 애틋하게 생각했었나. 살아온 평생, 언니랑 멀리 떨어져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몰랐었나. 10년 간 실컷 받기만 하고, 이제 막 시작되려는 언니의 육아에 동참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그런 건가. 사실 같은 도시에 살 때도 언니랑 자주 보지 못했던 것은 똑같은데, 나는 왜 이제와 청승을 떠는 걸까. 우리 혹시 언제 다시 싸우게 될지 모르니까 종전은 아니고, 휴전이라 해 두자.


아끼고 사랑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