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 살면서 여행이 고프기도 한가?
섬살이 꼬박 다섯 달이 된 시점, 애석하게도 이 섬살이가 끝날 날을 디데이로 세고 있다.
내년 봄 내 행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불투명한 미래인 것은 사실이므로 시한부라고 생각해야
미루기 대마왕인 내 성격에 뭐라도 대비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일은 늘 즐겁다.
평생 이 일을 하고 싶어서 7년을 돌아 돌아 왔는데, 그럼 당연히 즐거워야지.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초반만큼 감정 배제한 채 일에만 푹 빠져서 몰두하는 시기는 지났지만,
여전히 잘하고 싶다는 자존심으로 성의를 다하고 진심으로 대한다.
업무로는 바쁜 한 주를 보냈다.
공통적으로 지역사는 어딜 가나 인력난이다.
연출, 조연출의 개념이 나뉘어있을 수가 없고
PD 한 명이 연출이자 조연출이자 사무보조이자 때로는 작가 역할까지, 여러 갈래의 일을 한다.
일이 바쁜 건 나름대로 '바쁜 나 제법 멋져요.' 하며 즐기는 타입이고,
방송 관련, 또 방송이 아닌 그 외의 일이더라도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해보는 건
내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이기에 당연히 불만은 없고
"오히려 좋아-!"를 속으로 비밀스럽게 외친다.
겉으로는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듯한 쇼맨십 아닌 쇼맨십을 보이기도 한다.
많은 일을 하는 건 거부감 없는데, 그런 내게 일을 점점 더 쌓아주는 회사면 약간의 연기력은 필수.
라디오 게스트 대타를 나가면서 20분가량 되는 코너물 스크립트를 쓰게 됐다.
매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일 것이므로,
내가 가장 다루고 싶고 할 말이 많은 주제를 택하자 싶었다.
<30대를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20대를 지나 30대를 맞이하며
내 직장생활과 또 사회에서 만난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평소 하던 생각을 글로 정리하면서 다짐하게 됐다.
잘 걸어가보자고.
그리고 떠나보낸 후 후회하지 말고 현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하자고.
촬영 때를 제외하곤 바다 구경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차로 드라이브하며 두어 번 바다 내음 맡고 온 게 전부다.
4면이 바다 그 이상으로, 어디에서든 한라산을 등에 대고 쭉 나가면 바다인데,
저 수심 깊은 바다 보기가 두렵나, 한 번을 나가기가 이렇게 어렵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돌담 둘러싸인 섬이 아니라 저 망망대해일지도 모르는데.
물을 원체 좋아해서 풍덩 뛰어들어 수영도 하고 싶은데,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이곳에서도 나는 나를 옥죈다.
누군가에겐 이곳이 자유와 환상의 섬일 수도, 나 같은 이에겐 여전히 유배지일 수도.
생활환경은 만족한다.
내 마음가짐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지.
여행객으로 점점 북적여가는 공항에 갈 때는 오로지 용건이 하나다.
한 주를 부랴부랴 마무리한 후 금요일 저녁 바쁜 걸음으로 본가에 가는 날.
서둘러 공항에 도착해 능숙하게 체크인을 하고 나면 대기 장소에서 30분은 더 기다릴 만큼 여유가 있다.
그때가 마침 내가 제작한 프로그램 본방송이 방영할 시간인데,
내 집으로 가는 탑승구 앞 TV에는 꼭 타사 채널만 틀어놔서 도무지 내 걸 모니터링할 수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있을 때 그들이 내 방송을 보면서
어떤 반응인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몇 번을 시도했지만 리모컨도 없고 TV 자체에 채널 버튼도 없는 듯했다.
뭐 이래저래 씁쓸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 나도 집으로 휴가 가는 거다.'하고 생각하면서 괜히 저 끝 게이트까지 걸어갔다 오며 몸을 움직인다.
돌아오는 주에는 친구네 커플이 섬에 여행을 온다.
커플끼리 알아서 잘 다닐 것이고, 내 원룸을 내어주지 않아도 된다 해서
특별히 손님맞이를 준비하고 있지는 않다.
내 시점에서는 태풍이 생각보다 조용히 지나가서,
이번주 여행 오는 사람들은 날씨 영향은 덜 받겠다 싶었다.
아무리 국내여도 이곳저곳 해안 따라 돌다 보면 며칠이 아쉬운데,
그중 일부 시간은 내게 내준다니, 참 착하다.
내 꿈과 삶 전체를 응원해주는 친구이기에 언제라도 잘해주고 싶다.
아마 8월은 계속 바쁠 듯싶지만 오랜만에 여행하는 친구가 날 일부러 찾겠다는데
나도 무조건 시간을 내야지.
나도 아직 여기 정보를 잘 모른다는 게 함정이지만, 아는 만큼은 다 알려줄게.
이 예쁜 커플에게 맛난 밥을 사줘야지.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으면 주말이어도 주 서식지는 회사 편집실이다.
한 평 남짓 공간에 모니터가 세 대나 되고, 장비에서 나오는 열기는
무더운 여름을 더 힘들게 한다.
설상가상 에어컨도 고장 나 구내식당에서 쓰던 선풍기를 끌고 와 켜두고 있다.
찬 걸 잘 안 먹는 나도 컵에 얼음을 한가득 퍼와서 와드득 씹어먹는 중이다.
그래도 문을 닫고 내 작업을 할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이 있다는 것,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나는 참 마음에 든다.
마냥 마음이 편한 직업인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일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다.
카메라도 좋고, 조명도 좋고, 세트장도 좋고, 소품까지도 사랑스럽고, 편집기도 좋다.
하, 근데…
가까이 여행 좀 가고 싶다.
오늘의 곡,
쿠키 영상 - 오반
https://www.youtube.com/watch?v=-DQU_Z_dI7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