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일이 남았어.
국외 출장을 가게 됐다.
국내외를 배경으로 한 10부작 다큐멘터리 중 두 편을 만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회사에 들어오고는 외부 활동을 맡은 적이 없는 터라
국내 출장조차 가본 적이 없는데, 졸지에 첫 출장이 외국이 돼버렸다.
"정 PD, 영어 하지?"
"아, 네, 뭐…"
"미국 가."
영어를 한다는 싱거운 이유로 취재 대상 국가 몇 곳 중 미국으로 배정이 됐다.
한 달여를 넘게 준비하면서,
16시간 시차와 물리적 거리가 무시할 게 못 된다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마음이 급한데, 바로바로 연락도 할 수가 없고,
사전 미팅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해야 하는 맘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진전시켜야 할 것들은 산더미인데, 일단 나도 평소 하는 루틴한 업무가 있으니 다 하고 나서
퇴근 이후 시간에 장황하게 글로 정리해 메일을 보내놓거나
시차를 고려해 하루를 넘겨 아침 일찍 보이스톡을 걸면서 설명을 하는 식이었다.
또 여러 회사를 경험한 나로서도, 회사마다 문서며 자금이며 처리 시스템이 다르니
뭘 해야 하고 뭐가 어떤 절차로 돌아가는지 전체를 한 바퀴 경험도 한 적 없는 상태에서
급히 처리하려니 어안이 벙벙했다.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되뇌었다.
이전에 경험한 회사들보다는 이곳 시스템이 몇 배 몇십 배는 간단하니 쉽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출장을 며칠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편집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걸 경험했다.
미국 측에서 방문을 거절한 것이다.
이유는 나(회사)와 소통하면서 서로 합의되지 않은 지점이 있는데
그걸 나는 대안이 없어 그대로 밀고 나가려 했고, 그쪽에서는 부담을 느낀 듯했다.
상부에 보고는 했지만, 이제 와 촬영을 다른 방향으로 틀기가 싫었다.
무엇보다 허무했고, 욕심이 나서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되살려보려고 노력했다.
당장 그날 밤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로 메일을 보냈고,
미국 시간으로 아침에 수신 확인이 된 것을 확인한 이후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편지를 썼다.
편집을 끝내야 하는 날이었는데도 오전 내내 편지를 쓰고 고치는 데 시간을 썼다.
편지까지만 쓰고, 이젠 기다림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물론 초조했다. 출장일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았으니.
초연히 기다리다 오후에 연락을 받을 수 있었고,
내 진심이 가 닿았는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처음 준비할 때부터 우여곡절, 다사다난한 출장이어서
사실 그때까지도 마음은 많이 고달팠다.
그래도 이젠 됐다, 가기만 하면 되겠다 하고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어디나 그렇듯이 빠듯한 제작비 안에서 성의 표시를 하려 해도 쉽지 않다.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오는데도 이렇게 시간을 들여 나를 맞이해 주고
촬영에 협조해주려 하는 마음이 이미 고마웠다.
제주에서만 구할 수 있는 걸 가져다가 선물하고 싶었다.
땅콩초코파이, 백년초초콜릿 같은 걸 도저히 사갈 수는 없어서
뭐가 내 방식인지, 나다운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 정신적 지주인 선배에게 녹찻잎을 좀 구해달라고 했다.
차밭에서 바로 라벨도 없이 은박에 포장한 찻잎을 구했다.
출장이 확정되고 나서 한 부탁이므로, 출발까지 5일도 채 남지 않았을 때였는데
본인 일처럼 발 벗고 나서 전화를 걸어보고 결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신경 써줬다.
짬을 내서 밖에 나가 전통주도 몇 병 사 왔다.
미국에도 참이슬이니 한라산이니 없는 게 없다지만,
무겁게 뭘 가져오냐 했지만,
그래도 받았을 때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묻은 기분 좋은 선물이면 했다.
내일 떠난다.
아직 짐은 덜 챙겼는데 여러 가지로 자꾸 조바심이 나서,
여권과 현금과 구성안만 잘 챙기자는 생각으로 긴장을 덜고 있다.
정신적 지주 선배는 내게 장문의 톡을 보내왔다.
내가 조바심내고 걱정하고 있을 걸 알아서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남 마음을 살뜰히 챙기지.
나는 귀인이 주변에 있는 팔자라더니, 그게 꼭 맞는 것 같다.
마음이 차분해졌고 힘이 났다.
욕심은 끝이 없는지,
연락 좀 해주면 좋겠는 사람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렇게나 무관심하다.
내게 마음 써주는 사람들에게만 잘해줘도 모자란데,
나는 이렇게 무관심한 사람에게 오늘도 신경을 쓴다.
언젠간 헛수고인 걸 나 스스로 좀 깨닫기를.
내가 연출하는 프로그램은 현장에 나가 인물을 만나 생활을 들여다 보고
인터뷰를 하는 식의 리포터물 10분에, 그 코너를 보면서 스튜디오에서 진행을 하는 전형적인 매거진 프로다.
이번 주는 스튜디오 녹화에 내가 들어갔다.
출연이 어색한 것은 아니었지만, 할 때마다 마음의 부담이 조금씩은 있다.
어떻게든 하긴 하겠지만, 조금 더 잘하고 싶은 조바심이겠지.
문장이 입에 잘 붙지도 않고, 생각보다 발성이나 발음이 잘 안 될 때가 많아서,
결국 나중엔 연출 이상으로 방송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를 확장하려면
스피치 학원이니 뭐니 하는 걸 한 달이라도 다니면 어떨까 생각도 해본다.
이번 영상에는 제주도민이 대거 출연하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참여해서인지 여느 때보다 반응도 뜨거웠다.
나는 우리 엄마 보라고 내 영상을 아카이빙 한다.
촬영본이 남지 않는 라디오 같은 방송에는 내가 셀카봉 들고 들어가 직접 나를 찍는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 엄마 머릿속에선 상상이 잘 안 될 거다.
근데 링크 하나 보내드리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른다.
딸 자랑에는 영 소질이 없는데, 그래도 주변에 퍼 나르고 기분 좋아하신다.
보람이 있다.
어느덧 24주 차, 여섯 달이 다 돼간다.
날짜를 꼽아보니 198일이 남았다.
언제 200일 아래로 내려가나 했는데 이렇게 앞자리가 깨지니까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다큐를 찍어오면 이제 남은 날이 절반으로 남을 테다.
남은 시간 동안 뭘 하며 어떻게 지내야 할까.
미련 없이 또 다음 발걸음을 떼야겠지만, 지금 같아선 좀처럼 떠나기 싫을 것 같다.
하, 198일 남았네, 정말.
오늘의 곡,
[The 시즌즈 최정훈의 밤의 공원]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 잔나비
https://www.youtube.com/watch?v=PjS91UkHja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