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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 J Feb 15. 2017

노을 지는 하늘을 닮은 작가,
웨스 앤더슨

영화학도의 지극히 사적인 영화 이야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이미지 출처: http://www.konbini.com

손목마저 고운 이 언니, 아니 이 남정네가 바로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감독이다.

멋있으니까 한 장 더.


이미지 출처: http://www.thefocuspull.com


 우리는 영화 하나하나를 일일이 거론하며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누구 감독 하면 그에 대응하는 수식어와 느낌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감독들은 필모그래피가 어느 정도 쌓이게 되면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이미 사람들은 대충 그 영화가 어떨 것이란 예측을 70%(?)쯤은 할 수 있게 된다. 비교적 최근에 봤던 영화들을 예로 들어 보면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그러했고, 홍상수 감독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뻔하게 예측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새로 나오는 영화를 덜 보지는 않는다. 나 역시도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가 놀랍거나 새롭지 않았음에도, 굉장히 좋게 보았던 터라 그 형식을 그대로 카피해 단편영화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


 이처럼 웨스 앤더슨도 마찬가지로 ‘웨스 앤더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분명히 있다. 아름답게 구현해내는 공간과 색감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그 아름다운 배경들을 쉴 새 없이 팬 기능을 사용해 빠르게 보여주고(그럼에도 전혀 산만하지가 않다. 인위성을 일부러 유지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신비롭고 동화 같은 느낌을 가득 자아낸다. 자주 등장하는 주석과 내레이션이 관객으로 하여금 ‘나는 지금 동화 속에 들어와 있으니 무슨 일이 발생해도 괜찮아.’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몰입도를 한층 더 강화한다.



이미지 출처: http://www.salon.com


 시각적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자칫 간과할 뻔했지만 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문라이즈 킹덤>을 보던 와중에 흐름이 뚝뚝 끊기거나 무미건조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비단 서투름을 이용해서라도 최소한의 방법으로 이상적인 형태를 성취할 수 있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해야 한다지 않는가. 수차례 반복해서 보며 느낀 전체를 큰 그림으로 들여다보았을 때의 감상을 말하자면, 그 의도된 듯한 서투름은 내게 통통 튀는 인물들의 매력으로 다가왔고 일종의 건조한 유머였다. 그 속에 해학이 있고 엉뚱한 매력이 있고,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비록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이 다수 나오더라도 말이다. 줄곧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나오고, 쫓고 쫓기는 서사로 진행이 되는데도 웨스 앤더슨의 치밀하고 견고한 각종 장치들 덕에 우리는 이내 순수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감상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얼마나 패셔너블한가 하면, 싱글즈 같은 매거진에 패션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단독으로 게재가 되기도 하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틸다 스윈튼이 분한 마담 D.의 의상은 클림트의 그림 속에 등장한 옷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영화마다 컬러 팔레트를 사용해 더할 나위 없이 눈이 즐거운 색감을 부여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말이다.



이미지 출처: https://medium.com


 웨스 앤더슨은 혹시 강박주의자인가 싶을 만큼 화면이 자로 잰 듯 정확하다. 1점 투시도법을 즐겨 사용해 입체감을 주고 영화에 더 빠져들게 하고, 좌우 대칭이 정확히 떨어지게 하여 미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아나모픽 광각렌즈를 즐겨 쓰기로도 유명하다. 정형화된 화면 구성은 스탠리 큐브릭을 떠올리게 한다. ('디자인 관점에서 보는 완벽주의 감독, 스탠리 큐브릭과 웨스 앤더슨' by 슬로워크 참고) 둘 다 완벽한 미장센을 구현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고, 푸투라(Futura) 체로 자막을 쓰기를 선호하는 것 또한 닮았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는 이전작들에서 감독 자신의 내면세계 위주로 인도했던 것과는 달리 1930년대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나치즘, 파시즘 등을 지나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자신의 트위터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남겼다. 

‘용기와 희생, 사랑과 충성에 관한 이야기 안에 든 사탕과자 같은 작품이다.
막스 브라더스와 타란티노의 만남.’


이미지 출처: http://pinterest.com


 웨스 앤더슨은 어떻게 이런 그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 보자면, 데뷔는 이렇다. 나에게는 <상하이 나이츠>로 음 알려진 오웬 윌슨과 대학 친구로, 그의 형제 루크 윌슨과 함께 셋이서 <바틀 로켓>이라는 단편 영화를 쓰고 제작한다. 그 작품에는 윌슨 형제가 모두 등장하고, 이를 계기로 오웬 윌슨은 웨스 앤더슨의 페르소나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그 이후 빌 머레이가 웨스 앤더슨의 작품에 최다 출연하게 되고(7회), 많은 할리우드 배우들, 기존의 스태프와도 오랜 시간 함께 작품을 하면서 웨스 앤더슨 사단도 자연스레 생겼다. 


 1992년 당시 만든 단편작 <바틀 로켓>은 큰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영화계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극찬을 받으며 급부상한다. 그래서 4년 후 <바틀 로켓>을 장편으로 제작해 정식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 마틴 스콜세지는 웨스 앤더슨을 ‘넥스트 스콜세지’라고 칭하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90년대 작품으로 <바틀 로켓>을꼽기도 했다. 앤더슨은 어느 인터뷰에서 트뤼포를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았지만 말이다. (웨스 앤더슨이 가장 좋아하는 트뤼포의 영화는 <포켓 머니>라고 한다.) 다음은 마틴 스콜세지의 추천사 중 일부이다. “웨스 앤더슨은 사람 간의 단순한 즐거움과 상호작용을 아주 능숙하고 풍부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다른 영화들에서는 이런 감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문득 <내일에게 길을 내주다 Make Way for Tomorrow>, <이혼 소동 TheAwful Truth>의 감독 레오 맥커리가 떠오른다. 장 르누아르도 생각난다. 어렸을 적에 장 르누아르의 영화들을 보며 인물들을 향한 감독 자신의 애정으로 인해 나 또한 인물들에 교감하는듯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웨스 앤더슨이 꼭 그런 느낌이다.”

 나는 이전까지는 부끄럽게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작품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서야 <택시 드라이버>,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등의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주로 범죄 영화 속에서 그리는 어둠의 세계, 이탈리아 이민자 2세로서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잘 표현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영화학 수업을 들으면서 그가 멜리어스를 존경해 직접 출연하기까지 한 <휴고>라는 작품도 알게 되었는데, 이처럼 마틴 스콜세지는 훌륭한 감독들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런 마틴 스콜세지의 행보와 성향을 파악해볼 때, 그가 웨스 앤더슨을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것이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http://www.oystermag.com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국내에서 70만 관객을 동원하며 급격히 알려진 케이스이고, 그 이전까지는 사실 웨스 앤더슨은 비주류에 속했고 국내에서는 크게 잘 알려진 감독은 아니다. 그러나 봉준호, 박찬욱 감독은 이미 그의 팬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을 정도로, 20여 년간 꾸준히 발자취를 남겨온 감독이다. 봉준호 감독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고 ‘200페이지짜리 예쁜 동화책을 빠른 속도로 읽은 듯한 사랑스러운 재미가 있는 영화’였다고 했다. 나 역시도 동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고 <호텔 테넌바움>, <문라이즈 킹덤> 등의 작품들도 웨스 앤더슨만의 특징과 매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재미있게 보았고, 역시 웨스 앤더슨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인상 깊었다. 웨스 앤더슨의 작품 속 캐릭터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가족의 죽음, 이혼, 입양 등을 겪은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속 어린 제로 역시 내전으로 인해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홀로 살아남아 피난해온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인물들은 평범하게 자라지 못하고 정신적 성장을 멈춰버린 것이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감독 자신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데, 그는 한 인터뷰에서 어렸을 적 부모님의 이혼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이었고 그 이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일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부자관계 코드 역시 어렸을 때 충족하지 못한 부성애의 욕구로 이해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http://www.youtube.com


 이렇게 웨스 앤더슨의 작품들을 꽤 많이 보고 났더니, 감히 영화감독으로서의 그를 ‘작가’라는 잣대를 빌려 분석해보고 싶어 졌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영화는 예술의 범주 안에 포함이 되는가에 대한 물음은 영화가 탄생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예술영화가 만들어지고, 영화가 예술의 카테고리 속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작가’라는 개념이 역으로 필요해졌다. 그렇게 작가주의라는 것이 성행하던 그 당시,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작가는 단순히 시나리오를 영상화시키는 연출가와는 무시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웨스 앤더슨도 이 당시의 시각에서 보면 작가주의적 작가로서 첫 단계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오징어와 고래>, <쉬즈 퍼니 댓 웨이>의 제작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데뷔작 <바틀 로켓>부터 최근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그는 그의 모든 작품의 각본을 직접 썼다.


 웨스 앤더슨에게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트뤼포의 작가 정책 첫 번째, ‘영화에서 작가는 오로지 감독만을 의미한다.’에 걸맞은 인물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물론 작가 정책이라는 것이 현시대에는 완벽히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잠시 빌려와 웨스 앤더슨에 대한 나의 생각을 풀어보겠다.) 영화는 분명 개인 예술은 아니다. 수십수백 명의 사람들의 공동 창작물이지만, 그의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웨스 앤더슨의 손을 거쳐야만 비로소 탄생하는 작품임에는 틀림없고,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웨스 앤더슨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느껴지는 작품을 기대하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예로 들자면, 이 작품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스 앤더슨은 이 작품의 작가가 아닌가? 문학 언어를 영상 언어로 바꾸는 과정의 모든 작업은 웨스 앤더슨의 손을 거쳐, 혹은 지휘 아래 나온다. 그것이 한 작품의 ‘감독’ 자리에 있는 이의 역할인 것이다. 트뤼포가 영화감독다운 영화감독이라는 의미로 

‘영화감독은 작가가 되어야 한다’

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이제까지 작가 고유의 권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의문점이 분명 생길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theweek.com


 웨스 앤더슨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속에 등장하는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은 플랑드르 파 화가들, 한스 홀바인, 브론치노의 그림을 참조했다고 하고, 각본은 오스트리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스스럼없이 밝힌다. 1950-60년대 록/팝 음악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웨스 앤더슨은 <호텔 테넌바움>에서도 <A boy named Charlie Brown>이라는 곡을 선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 전체를 감독 고유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 그 물음이다. 그런데 어째서 웨스 앤더슨을 영화감독다운 영화감독, 즉 ‘작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던 ‘작가’의 영향을 완전히 깨부순 타란티노 감독이 더 적합한 예가 될 수 있겠다. 라캉, 리오타르 등에 이르러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을 가늠하기에도 좋은 예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조합과 배열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 감독이라는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 감독이 배열해 놓은 세계를 인정한다는 뜻도 된다. 그 아래 자리 잡고 있는 할리우드 시스템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여전히 영화에 결정적인 색깔을 부여하는 것은 작가 개인이라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다.

 다시 말해 나는 바쟁이 말하던 사회결정론이나 구조주의보다는 새리스의 독특한 출생 경력이 영화를 좌우하게 된다는 작가주의가 더 웨스 앤더슨에게는 걸맞은 시각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물론 두 의견은 상반되면서도 상호 보완적이었다. 나 역시도 이에 수긍한다.

 덧붙여, 영화의 본질이 Cinematics라면 그것을 여지없이 잘 활용하고 보여주고 있는 감독은 웨스 앤더슨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을 보면 영화만의 표현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그의 방식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찰리 채플린은 이런 말을 했다.

‘영화는 결국 감독의 예술이다.’


 또 브레히트는 ‘영화는 예술을 필요로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어찌 보면 굉장히 대조적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 두 사람이 했던 말이 굉장히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이 두 가지 속성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쟁이 던졌던 질문, 

‘작가지만 무엇이 작가인가?’

에 대한 답을 명확히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방금 언급한 부분을 토대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현시점에서 내릴 수 있는 영화감독다운 영화감독의, 영화다운 영화라고 하는 것의 정의는 ‘예술’을 빌려와 배열을 하고, 감독의 예술로 채색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나는 이 정의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감독을 웨스 앤더슨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핀 드 시에클 목욕탕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던 웨스 앤더슨의 인터뷰 내용이 떠오르는 대목이다.(웨스 앤더슨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제작하던 중에 우연히 기적적으로 독일 괴를리츠에서 한 목욕탕을 발견하고, 목욕탕 장면을 촬영해 영화를 마무리지었다.)



이미지 출처: https://bestmovieshots.wordpress.com


 웨스 앤더슨 본인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루비치 영화에 그로테스크함을 가미한 것, 아니면 30년대 히치콕 영화에 가깝다. 특히 케이블카 장면은 히치콕 영화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왔을 법한 장면일 거라 생각하며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이전작들에 비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훨씬 더 서스펜스와 속도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지만, 그가 언제나처럼 관객들로 하여금 빈티지한 감성과 아날로그적 향수를 자극한 탓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는 동안 그로테스크를 느낄 새도 없이 그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아름다운 색감과 미학에 사로잡혀 마냥 영화 속에 젖어드느라 바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웨스 앤더슨의 작품들을 보면서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그에게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었다. 감성의 미학, 이야기꾼, 키덜트 등의 키워드가 흔히 그를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내가 느낀 웨스 앤더슨은 노을 질 무렵의 하늘 같은 작가이다. 하늘은 언제나 같은 색을 띠지 않는다. 날씨에 따라 맑은 날, 구름 낀 날, 비 오는 날, 무지개 뜬 날 하늘은 제각각 다른 색으로 채워지고, 해가 뜨고 짐에 따라 새벽녘 하늘도, 밤하늘도, 저녁 하늘도 저마다 그 색을 달리한다. 이처럼 시시각각 다른 색을 수놓는 하늘이지만 하늘은 어떤 때가 됐건 아름답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웨스 앤더슨의 작품과 그의 감성은 바로 이런 하늘을 닮은 것 같다. 특히나 그의 따뜻한 감성과 포용력은 마치 땅 위에 내려앉는 노을빛 같다. 세상이 노을빛으로 물든다는 표현이 적격일 것 같다.



이미지 출처: http://www.wildnatureimages.com


 웨스 앤더슨, 그는 노을 지는 하늘을 닮은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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