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 내 마음을 철학 사상으로 달래볼까?
직장 생활 14년차 이지만, 아직도 어느 순간마다 찾아오는 멘탈의 살엄음 化.
사람이 편리한 인터페이스를 구현하는 직업이라, 나 스스로를 달래줄 수 있어야 남들도 달래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그냥 내 마음이 아파서 스스로 달래는 방법 중, 사르트르의 철학 사상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포장해버려서 죄송합니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 인간 존재는 그 행위의 시작점에서부터 철저한 고독이 함께한다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무언가에 의거함으로써가 아닌, 그 자체의 무목적성으로 인한 자유에 의거하여 존재한다. 즉, 인간 스스로가 어떠한 목적, 본질, 혹은 그러한 것들을 ‘미리’ 짜놓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거나 행위하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무목적성의 방황과 고독을 겪게 된다.
무목적성이라니... 그래 역시 실존주의라는 흐름은 전후 절망감과 허망감을 지성으로 해쳐나가고자 하는 유럽 인들이 만들어낸 긍정정신인가봅니다.
나는 목적이 있는 존재인가? 삶을 살며 내 목적은 발전이던 비발전이던간에 변화해왔는데... 그것은 목적이 없다는 의미와도 연결되는 것일까? 목적이 없거나, 혹은 목적이 변하기 때문에 내 삶이 이렇게도 고단한 것인가? 나는 나를 유목적성의 존재로 판단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이 되었지요. 제 목적이 저를 위한 것인지 남을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었습니다. 조금...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인간을 의식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존재들과 구분한다.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자기와 자기가 이중으로 분리되어 자신을 평가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런 의식의 존재 방식으로 인해 인간은 항상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매순간 현재의 자신을 과거로 무화시키고 미래의 자신을 향해 나아간다. 존재론적으로 자유인 인간은 타자와 대면하여서도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고 한다.
와우. 그래요.
타자의 관심에 대한 욕망으로 자신을 노예화 하는 것을 매저키즘이라고 정의하는군요.
지난 10여년 간 나 자신의 노예화에 대해서 철학적 사상을 두고 참고해봅니다.
-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결핍되어 있고 타자로부터의 욕망으로 인해 계속해서 결핍을 채우려고 사는걸까?
- 진정한 자유는 타자로부터의 분리일까?
- 하지만 타자로부터의 분리는 불가능하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라트르는 "진정한 지옥은 타인이다." 라는 극단적 결론을 지었나봅니다.
역시 서양 철학.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이네요.
감성 정리하자면...
너무 쉽게 타인으로부터 상처받는 나. 이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상처의 깊이가 정도는 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신감에 비례하기도 하는군요.
오늘은 감성 정리를 하기 위해 기획자와 관련없는 철학 얘기를 했습니다.
다음 아티클 부터는 실무 얘기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