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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May 19. 2021

당신의 첫 기억은 지금 당신을

우리를 빛으로 견인하는 기억 활용법

그녀는 일하던 연구소에서 

동료의 추천으로 상담실에 오게 되었다. 

만성적인 우울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여러 사정 때문에 우리에게 시간이 한정되어있었다.


그녀를 처음 마주 했을 때의 느낌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생기 없음’이었다. 

표정 변화도 별로 없었고 감정을 이야기할 때도 무미건조했다.

관계를 형성하기도 쉽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상담실에 꼬박꼬박 왔다. 


인지적으로 뛰어나다는 점과 성실하다는 점이 

그녀를 지탱해주는 힘인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시 그녀를 돌봐줄 여력이 없었기에 

그녀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든든하지 않으니 

나와 세상 사이의 연결감 역시 희미했다.

그녀의 마음은 고여있는 물과 같았다. 

동요하는 일도 별로 없었고 

건져 올릴 기억도 별로 없었다. 

너무 밋밋하고 단조로워서 

삶에 걸리는 것도 별로 없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딱히 힘든 일로 기억되는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기억 역시 없다고.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직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그냥 해오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은’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 말은 너무 담담하게 하기에 

그 내용과 표현의 불일치 감에 그녀의 상황을 더 위태롭게 감지했다.

그녀와 이야기하고 나면 

나 조차도 마음이 수축되고 평평해지는 느낌에 멍해지곤 했는데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갑갑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가 삶에서 

내내 홀로 감당해온 마음이라는 생각을 하면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있었다.

 어쩌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왜 살아야 하는가?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 상담의 목표일 것도 같았다.





첫 기억을 물었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다른 기억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이 되자, 

어느 순간 그녀에게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기억이 무척 중요했다.

“업혀있었는데요, 추웠는데 엄마가 뭔가를 덮어주셨던 것도 같아요. ”

돌 전후의 기억이기에 

기억이라기보다는 어떤 감각의 조각, 

하나의 이미지 혹은 아기의 환상에 가까울 것도 같았다. 


나는 이 기억에 닻을 내리기로 하고 

처음에는 한 마디로 표현했던 그 순간의 느낌을 

아주 자세히 여러 번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자세히 말하고 말하게 하는 것, 

그 과거의 기억을 현재와 연결 짓는 것, 

그럼으로써 미래로 향하게 하는 것이 

그녀를 죽음에서 삶으로 견인하는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기억은 과거의 것만이 아니다. 

기억은 우리의 현재 안에도 존재하고 미래로 향한다. 

어떤 기억을 하는가에 따라 

기억을 어떻게 활용하는 가에 따라 

우리의 현재가 달라지고 우리의 미래가 갈린다. 


어찌 되었든 기억이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면 

나를 위한 선택적 기억이 필요하다. 

그 선택이 우리를 

삶으로, 빛으로, 이끌어 줄 수 있도록 

기억을 선별하고 그 기억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누군가의 따스한 등에 업혀 있는 기억, 

추웠던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고 따스하게 덮어준 기억

이 기억들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단단히 자리 잡힌다면, 

죽고 싶을 때는 이 번호로 연락을 해야 한다고 

다짐을 받고 서약서를 쓰게 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된다고 믿었다.

“당신은 사랑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당신은 사랑받았던 사람이다

그 후 삶이 무미건조했어도,

삶에 채워지는 것이 없이 무에 가까웠다고 해도

당신의 삶에는 따스한 사랑의 가능성이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 가능성은 생생하며

그런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이 

지금 현재의 불가능성을 안아주고 있다.

이 기억의 힘으로 살아보자.

그저 살 아내 보자.”

우리가 가진 기억에 어떤 힘이 있다면 

이 기억의 힘이 우리를 

어둠과 심연이 아닌 삶으로 빛으로 데려가 주길 

간절히, 간절히 바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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