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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May 19. 2021

당신의 슬픔을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알 것도 같지만 결코 알 수 없는 당신의 슬픔을


동네에서 오다가다 만난 사라(지어낸 이름)는 말이 굉장히 빨랐는데 행동은 더 빨랐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만나면 마치 예비된 대사가 있었던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사라가 입을 열기 하기 시작하면 나는 처음에는 덩달아 웃으며 대답을 해주다가 결국엔 언제나 조금씩 어지러운 감각에 중간에 끼어들지 못하고 그냥 듣기만 하게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정신없는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럼에도 나는 그냥 그녀가 좋았다. 그녀의 그 모든 말과 행동 속에 담긴 애정과 열정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또 언젠가부터 그녀가 진지한 이야기, 아플 수 있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를 그렇게 비껴가려 한다는 것을 감지하기도 했다. 진지하고 아프고 슬플 수 있는 이야기를 비껴가야만 하는 그녀만의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재미있고 가볍고 과장된 농담으로 이 모든 시간을 도배하려는 시도를 하려 하는 이유가.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그녀가 하나의 감정이나 내용에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고 떠밀려간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피하고 싶은 아픈 감각에 시달리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힘들 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피하기 위해, 덮어두기 위해, 말하지 않기 위해, 말을 한다. 아니,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르르 쏟아낸다. 지금 여기에 있지만 항시 도망을 치고 있는 것. 자신의 말로부터도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여러 운석들이 여기저기에서 날아와 서로가 서로에게 부딪치는 듯한, 입 속에 넣어 굴리면 이리저리 폭발하다 결국에는 혓바닥에 얼얼한 감각과 멍든 색을 남기는 불량식품 사탕을 먹는 듯한, 그런 감각을 나에게 남겼다.



흥미로우나 결국 아픈,

달콤하나 종국엔 날카로운 그런 감각을






상담실에서도 이렇게 도망치듯 대화하는 사람, 웃음 뒤로 어떤 슬픈 감정이 남는 사람을 많이 만났었다. 때로는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에 우리 마음이 더 많이 담겨 있으니, 나는 들었던 이야기 밑에 잠겨 있는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그려가기 위해 잡히지 않는 마음의 가닥, 실루엣으로만 감지되는 희미한 마음을 더 따라가기 위해 집중했다.



내내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또 내내 하지 않으려 한 이야기, 

닫아둔 이야기, 보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는 이야기가 따로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이야기 말고, 마음 깊이 잠기어 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길어올 수 있도록, 여러 질문들의 변주를 거울처럼 제시하곤 했다.





하나.

 때로 나는, 말을 받아쓰며 따라가던 

상담 기록지를 그대로 보여주며 이런 얘기를 하기도 했었다.



“ 지난 15분 동안, 4개의 사안을 나열하는 데에 시간을 썼어요. 제 생각에 4가지 주제는 A, B, C, D라는 키워드로 요약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궁금해요. 정말로 이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서 오셨을까요?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하기도 하지만 부족하기도 해요.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얘기할 시간은 충분해요. 


우리에게 마련된 시간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나요? 



둘, 

때로는 지난 상담 시간 이후 상담실 문을 닫고 돌아가는 길에 떠오른,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를 묻기도 했다.





“정말로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있나요? 지난 상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오늘 오시면서 이 얘기를 꼭 해봐야겠다고 생각하신 게 있나요? 혹은 이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했던 것이 있나요?”


셋.

때로는 이야기와 자신을 분리시키며 이리저리 튀는 마음을 비춰주곤 했다.



“분명 아픈 경험인데 그 경험을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감하게 얘기하고 계세요.”



넷.


때로는 모든 주어를 타자들로 채우는 주어 없는 문장이 늘어선 언어의 패턴과 그 언어가 드러내는 마음의 패턴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 모든 것에 대해 OO 씨가 이 이야기를 하며 지금 어떤 심정인지, 다르게 느껴지는 몸의 감각이 있는지, 그걸 더 듣고 싶어요.”



다섯. 

또 때로는 항상 같은 지점에서 다른 곳으로 튀는 듯해 그 전환의 지점이 가진, (내가 발견한) 공통분모가 그분에게 갖는 의미를 묻기도 했다.


“제가 느끼기에 OO에 대해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언제나 이야기가 바로 다른 곳으로 전환이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라는 상담실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운석들처럼 부서지고 사탕처럼 톡톡 튀는 그녀의 모든 말들을, 깔깔 거리는 웃음과 과장된 하이파이브와 그녀를 만나면 놀이동산에서 걸어 다니는 캐릭터 인형이라도 만난 듯 돌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기뻐하는 아이들의 흥분 사이로, 들으며 흘리고, 흘리면서 웃을 뿐이었다. 이 모든 정신없음과 흥분 사이에서도 순간순간 비어져 나오는 그녀의 아픔을 감지하면서도, 그 마음에 반응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짐작일 뿐 그녀가 말해주지 않은 한, 그녀의 진짜 마음이 어떤 지를 내가 감히 알 길이 없기도 했다.


( 이런 과장된 흥분과 정신없는 소란 후 내 안에 남겨지는, 그 불일치와 불협화음의 잔상을 써보려고, 그러니까 바로 이 글을 써보려고 메모를 해놓은 지 일 년이 지난 후에야, 그녀의 친구로부터, 어떤 요약본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이 모든 느낌의 정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또 이 조차도 그것이 얼마나 한 진실인지, 진심인지, 내가 과연 가늠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내 안에 남겨진 잔상, 그 의미를 이렇게 써볼 수만 있을 뿐. )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아픔의 구체적인 얼굴을 마주하는 것 그리고 그 아픔을 통한 연결감을 가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거나 쏟아내지 않는다(그럴 수 없다). 섣불리 아는 척하거나 위로하지도 않는다(그래선 안된다). 슬픔은 기쁨보다 더 그 사람의 본질에 맞닿아있는 것, 더 소중하고 조심스레 다뤄져야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길을 걷다가 길 건너편에서 빠르게 걷고 있는 사라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이들이 사라를 불러 세웠고 사라는 그날은 조금 지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리를 보았다. 보통 때라면 쏜살같이 건너와서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온 세상의 이야기를 끌어와 운석 같은, 폭탄 사탕 같은, 농담을 쏟아냈겠지만, 그날 그녀는 그저 건너편에서 손을 크게 흔들 뿐이었다. 어떤 날엔 그녀도, 그렇게 너무 지쳐서 하던 대로 하지 못하는 그런 날이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손을 크게 흔들고는 , 나와 아이들에게 허공 키스를 두 번쯤 날려준 뒤, 또다시 빠르게 어디론가 향해갔다. 사라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와 나 사이의 평행선을 생각했다.


감히 다 알지 못하는 슬픔을 지고 걷는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면, 내가 언제나 '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라는 그 편리하고 편하고 안전한 거리감을,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중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를 중얼거리며, 때론 손을 뻗어보기도 하고, 또 때론 까치발을 들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닿지 못하고 스쳐간 마음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지 가늠해보다 나도 모르게 크게 심호흡을 하곤 했다.



마음에 대해서, 감히 다 알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

이따금씩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알고 싶지만 섣불리 알려해서는 안 되는 마음에 대해서

알 것도 같지만 결코 알 수 없는 마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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