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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May 19. 2021

나는, 상담심리사

안아주며 안기는 사람

나는 왜 상담자가 되었는가



햇 병아리 상담자 시절, 각종 상담자 수련 프로그램에서 나는 '나는 왜 상담자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로 고안된 여러 질문을 받고 던지고 지우고 추가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나'가 중요했다.


저마다 다른 동기가 있었지만 나는 자주 동기들의 이야기 속에서 '타인을 돕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며 적성에 맞다'는 대답을 만날 때마다 조금 위축됬었 다. 왜냐하면 나는 사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많은 선택과 그 선택 밑의 동기에  '타인'이라는 변수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어디까지나 '나'가 중요했다. 


'나'가 알고 싶어 책을 읽었고 

'나'가 보고 싶어 타인을 만났고

'나'가 편해지고 싶어 타인을 도왔고 

'나'가 좋으니까 뭐든 했다.


나는 가끔 내가 너무' 나'에 몰두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뭔가 균형이 안 맞는 기울어진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 어떤 것을 할 때마다 내가 타인을 충분히 고려하고 배려하고 있는지 일부러 살피고 또 살피기도 했다. 내가 못 보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았고 그래야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갈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이타적인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이고 상담자가 되는 데에 이타성이라는 요소가 핵심 요소라면 나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정말로 그런지 대학원 과정 동안 살펴볼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그것이 진짜 나에 맞닿지 않는다면, 흉내는 내 볼 수도 있겠지만 오래 하긴 어렵고 괴로울 테니 이타적인 사람만 상담자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오래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나에게는 다행히 호기심과 열정이 있고 해보지 않고 안 되겠다고 미리 문을 닫기보다는 경험하고 지나가야만 마음을 접는 질긴 갈망이 있고(덕분에 아주 많은 고생을 사서 하기도 한다.) 그 갈망에 손잡아주고 응원해주는 좋은 사람들을 상담자가 되는 길목에서 많이 만나서 상담 심리의 길을 계속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필연보다는 우연이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가야 했다.




나는 본래는 문학 공부를 하고 있었고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그런데 심리학 수업을 듣다 보니 공부를 하면 나중에 글을 쓰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고 문학 수업의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측면만큼이나 심리학 수업의 상호적이고 논리적인 설명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리고 상담 심리학 교수님들이 다른 심리학 교수님들보다 내 마음에 더 와 닿는 이론 이외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시는 것 같다는 아주 막연한 느낌을 따라 대학을 졸업하고는 대학원 원서를 딱 한 곳에만 넣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조금 대책 없어서 더 많은 계획과 준비가 필요한 지 몰랐다. 넣으면 다 붙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운이 정말 좋아서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내가 왜 상담자가 되고 싶은지(내가 처음부터 되고 싶었는지도 분명치 않다. 나는 그저 글을 쓰고 싶었다)는 그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화두는 점점 더 "나"에게 중요 해지기 시작했다. 




이타 심 없이 상담자가 될 수 있을까?




대학 생활 그리고 그 이전부터 예민하고 상황 해석에 미숙하고 관계에 서툴면서도 내 삶에 대해 바라는 것이 많았던 나는  대학원 생활, 교육생 일 년 인턴 일 년 그리고 레지던트 2년의 긴 수련 생활 동안 좋은 상담 선생님들을 만났고 동기들이 상담자로 성장해가며 좋은 자극을 받았고 상담자가 내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다지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고 관계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대학원을 다닐 때에도 함께 하기를 고민하기보다는 혼자 떨어져 생각하기를 좋아했었고 대학원 여성학 수업을 들으면서는 여성학 공부를 더 하는 것이 내 길이 아닌가도 조금 고민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학자가 전하는 큰 틀의 방향 제시나 이론보다는 일상의 실천이 되는 작지만 울림이 있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나를 전율시키도 생생하게 살림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런 것을 잘하고 잘하고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함을 역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상담에서 원하는 것은 그냥 공감이 아닌 '정확한' 공감이었다. 나는 내가 그 다자 따스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함에도 내가 진심으로 느끼는 것, 내가 보는 각도에서 비춰주고 싶은 한 사람의 어떤 면, 나 자신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사고의 균형감각을 가지기를 바라기에 하게 되는 많은 말들이 결국에는 따스하고 이타적인 행위로 비침을 알았다. 나는 그저 사실을 이야기힌 것뿐인데 말이다. 




타인의 삶이 나를 전율시킨다



나는 이 작업이 마음에 들었고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어떤 결심이나 계획도 필요 없었다.


상담은 정말 매력적인 마음 작업이다. 나는 내담자로 나를 찾아온 분들께 매일 매 순간 배운다. 그리고 내가 삶에서 얻고 싶어 했던 삶에 대한 끈질긴 긍정과 열정, 축복과 기적을, 삶의 수많은 부정적인 사건과 감정 부딪침과 부서짐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역시 '경험을 통해' 겸허하게 배워오게 되었다.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은 우리를 단단하게 해 준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서툴고 미성숙하고 그다지 이타적이지 않지만 타인의 이야기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결국 가장 나를 나답게 하고 나를 가장 성장시키며 내 세계를 확장시키는 일임을 알게 되었기에 지금도 상담을 한다.


그전까지 내 안에서만 맴돌며 작은 동그라미만 도돌이표처럼 그리던 마음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나에게  타인의 삶 위에 내 삶을 포개어 넣는 일이 '나'를 생생하게 하기에. 타인의 삶이 나를 전율시키기에. 


각자 있는 자리에서 자신을 위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이기적인 동기가 결국 이타적인 결과를 불러올 거라는 어느 경제학자의 논리처럼  결국에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다 보니 결국 누군가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게 된다.  이것은 가장 절망적인 얘기를 듣다 보니 가장 단단한 희망의 이야기를 건져 올리게 되는 상담의 멋진 아이러니와 더불어 우리 삶 곳곳에 예비된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교차하는 지점과 맞닿아있다. 



나는 받기 위해 준다

잘 받기 위해 잘 주려한다



언젠가 내담자가 나에게 적어준 쪽지가 있었다. 


그분은 너무 이타적이라 삶의 굴곡과 아픔이 많았었는데 나를 세우지 못한 채 남을 세워 주가 위해 너무 애써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비탄을 상담실에서 샅샅이 살핀 뒤, 그런 이후에도 결국엔 다시,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향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기로 한다. 그것이 그분께는 '나'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The day I stop giving is the day I stop receiving. 

주기를 멈추는 그날, 받는 것도 멈추게 되리 


그토록 주었다가 상처 받는 일이 있었어도 그것이 계속되었어도,  주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결심, 나를 삶 속에 기꺼이 던지겠다는 결심 앞에서 나는 겸허해졌고 나는 우리가 가진 인간성, 사람이 사람을 향해 가는 마음들을 다시 알게 되었다. 그 모든 마음 마디마디에 굴곡이 있고 이리저리 비틀려있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은 언제나 나를 전율시켰다. 


그리고 그분의 쪽지를 내 삶에도 적용시키고 변용시키기로 한다. (많은 내담자들이 상담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삶에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고 이야기해주지만 그들은 모른다. 그들 모두가 상담자들에겐 삶의 계속된 터닝포인트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몰랐던 사실을 함께 알아간다는 것은 상담이 주는 또 다른 축복이다.) 사실 나는 받기 위해 주는 사람이지만, 받기 위해서라도 나도 계속 주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시도를 멈추는 그 날, 성공도 멈추리

The day I stop trying is the day I stop succeeding. 




그리고 오늘 그 문구의 새로운 버전이 생각나서 이 곳에 기록해 둔다.


The day I stop trying is the day I stop succeeding.  


과거의 실패에 마음을 닫고 또다시 시도하기를 멈추게 되는 마음으로부터 일어서며 내담자들과 나누던 그 모든 대화들을 이 한 문장에 담아본다. 


실패했음에도 다시 시도하는 것은 어렵지만, 힘들어도 시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다고. 내가 해온 모든 상담이 성공적이진 않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에 가까운 미완의 작업들을 계속 해왔기에 여전히 그 모든 것을 완성시켜나가기 위해 지금도 손쓸 수 있는 곳부터 매만져보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 시도를 멈추지 않겠다고. 그것이 오래된 시도 이든, 새로운 시도이든, 계속해나가겠다고.



삶이라는 기적 



예전에는 글은 노트에 연필로 썼다가 옮겨야 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상담은 상담실에서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국에서 한국어만 쓰며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이 글을 아이 셋이 여기저기에서 이것저것 늘어놓은 영국의 이층 집에서 청소기를 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엄지 손가락으로 메모장에, 자주자주 생각의 흐름을 방해받으며 쓰기 시작했다.


삶은 참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당신이라는 기적, 우리라는 기적. 

우리는 매일 기적을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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