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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May 19. 2021

상처의 사정거리에 있는 가족

사랑은 때론 침묵 속에서 더 잘 전해져요


갈등이 많은 자매들이 상담실에 찾아왔다. 처음에는 동생분이 남편과의 관계 문제로 상담실에 찾아왔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고 나자, 결국 언니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그녀가 하는 많은 관계 속 갈등의 출발점이었음을 느끼게 되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언니에게 함께 상담을 받으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언니는 처음에는 무슨 상담이냐며 펄쩍 뛰었지만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결국 먼저 함께 상담을 받으러 가보자고 제안한 사람은 언니였다. 왜냐하면 그 두 분은 수시로 다투고, 제대로 된 화해 없이 다시 뭉쳤다가, 또다시 다투기를 반복하는 시간을 보내며 마음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분은 어린 시절 가정 속 여러 아픔을 함께 하며 서로만을 의지하며 자랐다. 어떤 면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부모가 되어 지지하기도 하고 간섭하기도 하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이런 관계의 끈이 때로는 서로에게 큰 압박이 되기도 했다. 상처 많은 사랑, 사랑 많은 상처가 가진 관계의 속성이었다.


이제 성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가야 할 시기가 찾아온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두 분은 서로에게서 자유롭지 못했고 관계 속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두 분은 자매 같기보다는 부부 같기고 했고 단짝 친구 같기도 했고 부모 자녀 같기도 했는데 또 그러면서도 자주 싸우기에 서로에 대한 감정이 깊고 격렬해지곤 했다. 이 자매의 상담 목표는 말하자면  그냥 '자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각자 따로 상담을 하며 서로에 대한 감정을 어느 정도 풀어놓고 난 후, 함께 상담을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렇게 서로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풀어보고 그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게 되었고 조금씩 노력하며 달라지는 면도 있었지만 관계의 관성이 가진 힘은 크고 질겼다.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미로처럼 길을 잃는 것 같기도 했다.  가족 상담은 그래서 쉽지 않은 면이 있었다.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상담실에서 느꼈던 마음과 결심과 의미와 통찰이 다시금 흩어지기도 쉽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한 회기에는 감정 카드만을 써서 상담을 해보기로 했다. 질문들에 대해 감정으로만 답을 해보고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을 따로 덧붙이지 않고 오로지 그 감정만 집중해서 서로에게 보내주는 작업을 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날 서로에게 했던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 


"지난 일주일 간 내 삶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세 개만 선택해보세요. 

되도록 언니나 동생과 관련 없이 내 일상에만 국한된 감정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감정들을 안고 일주일을 살아온 동생에게, 언니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감정을 하나만 선택해보세요.






먼저 언니의 일주일이었다.


불안 


"꽃 가게 운영이 힘들어져서 생계가 불안해요. 이 전에 했던 가게도 잘 되지 않았어서 매일 같이 불안했었는데 이번 가게도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아서 요즘엔 밤에 잠이 안 와요."


화 


" 그런 데다가 화요일에 온 손님이 저를 무시하는 이야기를 했는데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고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자니 화병이 날 것 같은 것을 참고 있어요."


슬픔


"엄마의 기일이 다아오고 있어요. 엄마로서는 별로 좋지 않은 엄마였지만 여자로서는 불쌍하다 싶은 복잡한 마음도 있고요 그냥 담담했다가도 기일이 다가오면 별것 아닌 일에 눈물이 나는 게 엄마 생각하면 슬퍼서 그런 것 같아요."



동생의 감정들 역시 어둡고 무거웠다.


짜증


"아기가 너무 많이 울어서 짜증이 많이, 아주 많이 났는데. 또 그런 제 모습을 보는 것도 짜증인 것 같아요."



외로움


"남편과 사실상 주말 부부인데 무엇이든 혼자 다 해야 한다는 것이 외로워요."


소외감


"아기 엄마들 모임이 있는데요 가면 일단 수다를 떨 수 있으니 좋았다가도 얘기하다 보면 저만 소외되는 것 같고 겉도는 느낌이 있어요."


두 분이 일주일간 지나온 모든 감정은 무겁고 힘겹고 부정적인 색채가 담긴 감정들이었다. 이런 무거운 감정들을 안고 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지 못하고 만나서 이야기하면 다투기 시작하니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각자의 삶이 녹록하지 않기에 오히려 서로에게 의지하고도 싶은 마음이 들어서 더 다투게 되었는지도 몰랐다.




각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생은 언니를 위해, 언니는 동생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향하고 겹쳐지는 이야기 없이, 각자의 삶을 감정으로만 표현하니 오히려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밑에 깔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기도 했다. 



'불안'이라는 이름을 먼저 붙인 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불안을 불안으로, 또 언니의 불안을 언니의 불안으로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던 것이다. 동생은 말했다. 


"그전까지는 언니가 장사가 안된다는 얘기를 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나도 힘든 데, 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었거든요. "


하지만 언니는 그저 불안하기에 '불안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고 '불안하구나'라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가족이란 서로의 이야기를 속속들이 다 하려 하기에 그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애초에 서로에게 향하던 공감의 마음을 잃게 되기 쉬운 관계인 것 같았다. 서로에게 쌓인 이야기가 많아도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는 담백하고 담담한 감정의 표현이 오히려 필요하기도 하다.


우리는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통을 다다익선으로 여기지만 소통은 많이 시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가 준비가 되었을 때, 담담하고 담백해서 따로 남는 마음이 없고 곁가지로 흐르는 마음이 없을수록 더 나은 소통이 가능하다.


서로에 대해서 차마 침묵할 수 없어서 덧붙인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경우가 가까운 관계에서는 더 많았다. 가까운 관계라는 것은 그렇게 서로가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상처의 사정거리 내에 있음을 의미했다. 그럴수록 침묵은 더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유를 주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 싶은 것을 줄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도록. 너와 나 사이를 침묵으로 빈 공간으로, 여백으로 남겨두는 시간이 필요하다. 









두 번째 질문은 서로에게 향하는 질문이었다. 선물은 하나로 모아서 주기로 했다.



"일주일 동안 이런 감정들을 견뎌온 언니에게, 그리고 동생에게 어떤 감정 카드를 주고 싶은가요?"



동생은 언니에게 '자랑스러움'을 언니는 동생에게 '사랑스러움'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그들이 일주일간 각자 지나온 여러 감정 카드를 탑처럼 쌓아 자랑스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덮어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서로에게 느꼈던 원망과 서운함, 실망과 상처와 같이 해묵은 감정들도 함께 덮어지길 원했다. 그렇게 사실 서로를 향한 감정의 핵심인데 다른 이야기들을 하느라고 오히려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감정은 전하지 못한 채 서로의 마음을 오해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있었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분명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생성되는 여러 힘겨움으로 인해 서로의 마음이 뾰족하고 날카로워지고 어두워져서 서로의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할 시간이 다시 찾아올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말하고 싶을수록 침묵을 쓰기로 했다. 더 많은 말을 쌓지 않아도 그저 언니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동생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존재로써 서로에게 이미 충분한 위안이 되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 상담시간을 5분 남겨두고는 서로를 바라보게 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으로 서로를 안아주는 상상을 하기로 했다.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함께 해온 시간이 길었고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나눈 말의 목록이 길었지만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것이 5분도 어려운 것이 또 가족이었다. 


사랑은  덧붙이는 말보다, 침묵 속 응시 속에서 더 잘 전달되기도 한다. 

무엇을 주거나 못 주었고, 

무엇을 받았거나 못 받았는가를 걱정하기보다는,

 '무엇을 주고 싶은가'라는 그 하나의 마음에 집중하는 마음이 진짜 사랑이었다.  








오늘 하루, 브런치에 글을 정리해 올리며 행복했네요.

또 시간이 될 때마다 글과 함께 찾아오겠습니다.


선안남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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