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의 역사

by 프시케

오랜만에 남편과 집에서 한 공간에 있는 순간,
이곳은 2층 화장실.

나는 천장을 가리며 말했다.


" 저기, 곰팡이가 서리려 해요"


한 달 전 즈음부터 계속 스치듯 마주한 곰팡이의 가능성.

밀린 집안일들( 그러나 손쓰지 못한 일들) 이 이렇게나 곳곳에 박혀있다.

게다가 아파트가 아닌 하우스 생활 속 살림은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리해내야 하는 자잘한 요소들도 많다.



우리의 대화는 주어진 시간도 짧지만
언제나 1호, 2호, 3호의 아이들이 함께 하므로
대화는 짧고 명료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사실 대화라기보단 전달 사항 점검에 가깝다.







남편이 바로 곰팡이를 제거하자
​나는 바로 생각해본다.

도움이 필요했으나
미처 말하지도 않었고
말할 수도 없었던 집안의 밀린 과제 가운데
남편 찬스를 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틀 전에 멈췄던 시계가 떠올랐다.



"1층에, 시계도, 배터리가, (없네요)"







주어 생략, 수식어 생략, 서술어 생략
그리고 남편의 얼굴도 안 보고
허공에 던지는 말이지만

남편이 공중에 떠 있는 그 말을 받아 든다.


" 배터리, 거기에 있죠?"

" 거기, aa 랑 aaa다 있어요"

1층으로 내려가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역시 밀린 집안일 가운데 하나인 거울 닦기를 하다가
피식 웃는다.

조금 전 우리의 대화를 복기해보며
​우리 사랑의 역사와
우리가 나누는 문장의 변천사를 본다.
그리고 우리 사랑이
하루하루 몸체를 바꾸어
그와 나 사이에서 흐르고 있음을,
역시 거울을
보듯, 물끄러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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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나 결혼하기로 했고 서로를 닮은 아이들을 키워가기로 해온 우리는,

얼굴을 보지 않고도 서로의 표정을 읽고
들리지 않아도 한숨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었던 문장들을 통해
표현할 수 없었던 문장들까지 해석한다.

지난 10년 넘게 해온 일이기에
서로를 읽는 일에 익숙하고 능숙하다.

서로의 힘겨움을 되도록이면 덜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오며
그렇게 함께의 시간들을 키워왔다.


결혼 전에는

나란히 앉아 각자 보고 싶은 책을 보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멋지고 좋아 보이는 것이 있을 때면

"저길 봐요!" 손가락을 가리켜 함께 볼 수 있다는 것,
그런 사랑으로 충분했다면

지금은

집에 있을 때면
아이들을 봐주며
나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려고 하는 것
( "아이들은 내가 볼 테니 나갔다 와요.")


문제 사항 접수하면
뭐든 바로 해결하려 하는 모습에서
그의 사랑을 느낀다.



각자가 가진 한계를 애써 비껴가며,
서로를 위해 더 나은 것을
찾아주고 싶은 그 마음에 닻을 내린,
일상적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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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가 높은 하우스의 화장실 천장 모서리는 다시 말끔해졌고
역시 높은 곳에 있는 시계는 다시 제 몫의 일을 한다.

나는,
혼자서는 다 하기 힘든 일들을 올려다보며
시곗바늘이 다시 한눈금씩
꿈뻑꿈뻑 자리를 옮겨가는 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들으며,
사랑을 느낀다.

이 사랑은 계속 몸체를 바꾸나
알맹이는 그대로 남아
우리 곁을 맴돌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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