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의 효율

칼질을 하다가

by 프시케

주방에서 음식을 할 때

도마에 야채를 올려놓고
급하게 칼질을 해서 썰은 뒤
자잘해진 야채들을
달궈진 프라이팬에 쏟아내는,

그러면서 야채를 흘리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한다.

흘리는 야채들을 바라보다가,
이 일이 왜 자주 발생하는 가를 돌아보다가

그것이 단지,
바쁘게 몸을 움직여서가 아니라
야채들과 함께 가야 할 동선이 길어서,
비효율 적이어서,
애초 설정이 잘못된 것이라,

디폴트 값을 바꾸기로 했다.

습관을 거스르고 관성을 넘어서기로 했다.



단 며칠만,
익숙함을 내려놓고 낯선 일을 반복하면
낯 섬은 어느 순간 익숙함이 될 것이고,
야채를 흘리는 일도 줄어들고
일도 효율적으로
제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도마의 위치를 옮겼다.


당장 불편해졌다
그냥 위치만 달라진 것뿐인데

손에 익지 않은 일을 하자,
가까워졌는 데도 오히려 야채를 더 흘렸다.



어느 순간 도마는,
내가 다시 가져다 놓겠다는 생각도 하기 전에,
예전 그 자리에 가 있었다.

급한 대로,
야채를 흘리며
예전처럼,
요리를 했다.

변화하는 시간,
습관을 바꾸는 시간을
나에게 줄 여유가 없으니

하던 대로, 가던 대로 가자 싶었다.
습관의 힘은 이토록 강하구나
비효율로 흘리는 것이 더 있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간단한 것인데
그 간단함이 간단하지 않았다.





=

오늘 칼질을 하다가
야채를 흘리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니,

애초에 도마가 거기에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칼질을 하더라도
혼자 등을 지고 하지 않고
아이들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쪽,
여차하면 칼을 내려놓고
뛰어가기 쉽다고 생각한 쪽에
도마를 놓았었다는 것.


비효율에도 이유가 있고
마음의 모든 디폴트 값에도 효율이 있었다는 것.

간단한데 간단하지 않은
자잘한 마음의 관성과 저항과 습관도
애초에 거기에 묶여
매듭이 지어진 이유가 있다는 것

때로는 그 매듭을 풀려 애쓰기보다는
그냥 두고 걸리적거리며 덜컹대며
비효율적으로
흘리며 살아도 괜찮다는 것.




비효율이 가진 효율이었다.
야채도 흘리고
마음도 흘리는 효율






12. 29. 칼질을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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