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그만 웃어
아프고 느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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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과 여> 속 한 장면이다.
개울가에 신발 한 짝이 떨어진 아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규칙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아픈 아이,
세상과의 소통이 어려운 아이.
그 아이의 신발 한 짝이 개울가에 떠내려간다.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아이 엄마가 움직인다.
그녀는 나머지 신발 한 짝도 개울가로 집어던진다.
그러고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활짝 웃어 보인다.
‘이것 봐 신발들이 이제 함께야’하고 말하듯.
이따금 그 싱그러운 웃음을 생각할 때가 있다.
아이를 기르며 엄마들이 몸을 던져 연출해야 하는 몸짓과 표정이 얼마나 많은 지,
마음을 반해 활짝 웃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한다.
아픈 아이를 기르는 엄마들은 그런 순간이 얼마나 더 많을지,
웃으면서도 속으로 우는 순간이 얼마나 많을지,
울면서도 웃어내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을지,
여러 생각과 장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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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를 처음 만났을 때는 나는 그냥 남보다 더 잘 웃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하면서 든 웃어 보였다.
지나가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는다는 어린 학생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나도 덩달아 따라 웃게 되기도 했지만
그녀의 모든 웃음에 그대로 함께 웃지는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자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었다.
그 웃음을 기점으로, 그 웃음을 무게추 삼아,
나는 그녀가 왜 그렇게 웃음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음은
‘그래도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낫잖아’하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웃음이기도 하고, 아이에게 보내는 ‘괜찮아’의 웃음이기도 하고,
세상 사람에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주세요’ 하는 웃음이기도 하다
는 생각을 했다.
이런 웃음이 너무 애쓰는 웃음이 되는 것 같을 때면,
한 번쯤 그녀의 소매를 붙잡고 이런 말을 하는 상상을 했었다.
'엄마, 이제 그만 웃어요. 힘들 때는 웃지 않아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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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학교를 짓는다는 얘기에 무작정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들,
그 사람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던
한 엄마의 사진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사진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고개를 숙여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아이의 일이기에,
싸울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던 엄마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제발’을 되뇌며 호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그 엄마 곁에서 마음으로라도 함께 무릎을 꿇는 것,
‘제발’의 마음에 힘을 보태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발은 두 짝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는 규칙이 망가지면
마음이 망가지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
내 아이가 아무리 해도 다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고
보통의 관계 방식을 습득해내지 못할 것,
이라는 이야기를 받아 들고도 웃어야 하는 엄마,
포기할 수도, 싸울 수도 없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엄마
(사실 그녀의 딸은 학교를 짓는다고 해도 그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그녀들 속에서 나를 본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아프고 느린 아이들을 키우고 있고,
아이들은 함께 크고 있으니까.
내 눈물을 닦으며 그녀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상상을 한다.
나의 가장 소중한 대상을 위해 가장 간절한 기도를 하며,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음 앞에 무릎을 꿇는 상상을 한다.
‘엄마, 이제 그만, 웃어요. 괜찮을 거예요’라고 속삭이는 상상을 한다.
########이 글은 저에게 한 달 전쯤 쪽지를 보내신 엄마를 위해 쓰기 시작했어요.
쓰고 고치다가 애초에 쓰려던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제야 이렇게 쓰게 되었네요.
아프고 느린 아이를 키우면서 그 아이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내내
의식하며 키워야 하는 엄마,
지금까지 온 길이 많이 힘들었고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먼 길을 세어가며 가야 하는 엄마를 위해
'함께'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엄마, 너무 많이 울지 말아요.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는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