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노땡큐입니다~~~~

당신의 감정노동이 너무 고되지 않도록

by 프시케





'스팸은 별로야!'

대학원 시기, 함께 기숙사 조교를 했던 동생과 주말 아침 일어나 밥을 먹으며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전날 자기 전에 함께 메일함에 쌓인 스팸들을 대거 지우면서 했던 성토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



' 아 이런 시간 좀비들이 있나'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조교 일을 하느라,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느라, 상담센터에서 수련을 받으라,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을 읽느라, 일분일초가 아쉬웠던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제일 별로라는 얘기를 했다.

그러다가 동생은 반찬으로 나온 스팸을 가리키며, 그 우연성에 웃으며 이런 얘기를 했다.

"그런데 언니, 스팸이 주말에는 딱 안 오네.

아, 듣고 보니 그랬다. 월화수목금, 줄기차게 오던 스팸이 주말이 되니 딱 오지 않았다.


주말에는 오지 않는 스팸을 생각하니, 스팸이 아닌 스팸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들도 주말엔 쉴 필요가 있는 사람들. 월화수목금, 스팸을 보내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좀비들이 아니었다. 이들도 생활인이었던 것이다. 스팸의 인간성을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


그 대화 이후, 그전까지는 쌓인 스팸을 한꺼번에 지우면서 날카로워지는 마음이었는데 마음이 조금은 동그래졌다. 주기적으로 스팸이 쌓인 휴지통을 비워가며 속으로 이렇게 외칠 마음이 들었다.


“어이쿠, 수고들 하십니다만, 노 땡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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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전화 소리에 일어났다. 아이들 없이 3년 만에 혼자 잠을 자고 10시 이후에 일어나는, 나에게는 역사적인 날이었는데, 전화가 잠을 깨운 것이다.

비몽사몽 전화를 받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한 여자분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마치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는 것처럼 대화를 열지만, 한두 마디만 들어봐도 느낌이 온다. 훈련된 상업적인 전화, 광고성 전화다. 잠이 절로 깼다. 그렇게 내 귀한 잠, 귀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말 톤과 리듬을 따라 경쾌하게, 상냥하게, 그러나 마음은 크게 담지 않고 말하고는 끊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전화를 이틀에 한 번씩은 받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스팸을 받고 홍보성 전화를 받는 것도 나의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스팸을 보내고 홍보성 전화를 돌리는 것이 일상의 중요한 부분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전화를 끊는 나만의 매뉴얼을 만들었다....... 까지는 아니고 노선을 정했다. 따로 감정 소비, 시간소비하지 않고 되도록 빨리, 그리고 친절하게 그분들의 말투과 리듬에 맞춰 끊는 것,


그렇게 내 시간은 보호하고
그들의 감정도 고려하는 것



1) 이 분은 나와 전화를 끊고 난 이후에도, 삶의 또 다른 시점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2) 스치는 짧은 대화 한 마디가 누군가의 하루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루를 쌓이기 때문이다.

3) 스팸으로 분류될 일을 평생 직업으로 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이런 시도를 영어로는 cold call이라고 불린다. 대부분의 cold call은 cold shoulder를 감수하는 일이다. 이미 환영받지 못할 것, 차가운 반응을 감수하고 시도를 반복해야 하는 것은 받는 쪽에서도 쉽지 않지만 하는 쪽에서 역시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목소리가 그 누구의 삶에 잠시라도 함께 한다면 그 삶을 순풍으로 돌려주지는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역풍으로 느끼게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단지 한번 받을 뿐이지만 그는 하루에 이런 전화를 얼마나 많이 해내야 하는 것인지, 낯설고 차가운 통화 사이사이에 감수해 내야 하는 작은 한숨들과 마음 추스름의 시간들이 반복될 것임을 가늠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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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결정적으로, 이런 기억이 있다.


첫째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와 손을 잡고 어디론가 바쁘게 걷고 있었던 적이 있다. 마음이 바빴는데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어디선가 나타나 아이에게 풍선을 쥐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아이는 당연히 좋아했고 나는 습관적으로 경계했다. 그분은 아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시며 아이가 몇 개월인지 아이가 '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를 물으셨다.


“저도 요만한 아이가 있어요. 어머님 혹시 @@@학습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아네, 생각 없어요!”


나는 그 분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더 힘을 주며 아이가 들고 있던 풍선도 그분께 다시 돌려주고 가던 길을 갔다. 어떤 것도 받지 않고 어떤 관계도 하지 않겠다는 몸짓이었다. 그즈음엔 이미 이런 마주침을 반복하며 진력이 났던 터라 나는 이런 마주침을 최소한 하고자 애썼다.

몇 살도 아니고 몇 개월로 발달 단계를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보면 눈을 반짝이며 학습을 시키라고, 시켜야 한다고 권하는 그런 말들이, 그런 권유들이, 나는 별로 였다.

그렇게 아이와 더 꼿꼿이 더 빠르게 앞으로 향하려다, 뭔가를 깜빡 놓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던 길을 되돌려야 했다. 그래서 바로 방향을 돌려서 전에 앉아있던 장소로 향하는데,


그러다가, 그렇게,

뒤에서 그분의 전화 통화를 듣고 말았다.


'저도 요만한 아이가 있어요', 는 동질감 형성을 기반으로 대화를 더 이끌어가려고 하는 말일 것이라는 의심이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생활력이 없는 남편과의 이혼 위기로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생활 전선에 나왔다는 것을 듣고 말았다. 그녀는 아이가 어딘가에 넘어져서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사정이었다. 바로 아이에게 가지 못하고 나처럼 이렇게 찬바람을 쌩쌩 날리며 거절을 반복하는 엄마들에게 또 새롭게 말을 걸어야 하는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버린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가 지금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와 앞으로도 헤쳐 나가야 할 삶의 시간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나는,
불과 1분 전에 보였던 구김살 없이 생글생글한 그 상업적인 미소를 경험한 나는, 그녀의 진짜 마음과 차가운 거절을 감수하면서도 계속 세상에 송출해내야 하는 시도들을 생각했다. 진짜 마음과 만들어 내야 하는 표현, 그 둘 사이에 시간차는 거의 없는 데 마음의 낙차는 너무 커서,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손목을 잡고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우리가 놓고 온 물건을 되찾기 위해

멀리 돌아 돌아갔다.


이후 Cold call에 대한 내 노선과 매뉴얼을 살짝 바꿨다.

차가운 전화 cold call를 차갑게 받지 않을 것,
거절은 짧게 중화시켜할 것,

“아 ~네~ 괜찮아요~~~”


그렇게 Cold call을 받는 것도 내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누군가에게는 그분의 일생이 담긴 일이기 때문이다.




글. 글쓰는 상담심리사 선안남

사진.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