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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시케 Mar 20. 2021

자기 언어라는 삶의 무기

심리학 작가로 살며 연마하고 공유해온 것에 대해

1.


첫 책을 내고 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이메일 함에 도착한 메일을 읽고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군대에서 이 책을 읽고 또 읽은 독자분이었다. 그는 특히 책의 내용 가운데 어느 한 부분 덕분에 자신이 건강한 이별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대상 영속성'의 개념을 적은 부분이었다.(눈 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대상(/물체)이 여전히 존재(/건재) 한다는 것을 믿는 나와 대상, 세상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이 부분을 읽고 그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이 자신에게 정말 중요했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헤어진 여자친구에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힘들었는데, 자신의 마음이 '설명' 이 되자 비로소 중독처럼 집착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조절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실 대상 영속성이라는 개념은 그 책에서 단 몇 줄로 설명한 부분이기도 했고 심리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개념이기에 나는 이 이메일을 받고 오히려 놀랐었다.(게다가 첫책이란 습작노트의 초고들을 편집없이 나열한 듯한 느낌에 따끔거리는 책이기도 했기에)


나는 진심으로 그 책이 그 때 거기에 꽂혀 있어서
그의 마음에 도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책의 그 글귀는 결국 그를 위해 쓴 것이었다.


내가 나를 이상하게 보면서 힘든 순간,
난 이상하지 않아, 를 확신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의 힘을
그렇게 한번 더 믿게 되었다.



2.


스토킹에 시달리는 내담자를 상담하던 시기였다.

스토킹을 당하면서 괴로운 마음도 살펴야 하지만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녹음을 하거나 신고를 하거나 현실적인 전략을 함께 세우는 것도 중요했는데, 그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내가 미처 못 보고 있던 지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스토킹을 하는 심리에 대한 이해였다.

그 때 자료들을 다 보고 난 후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남긴 메모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토커들은 '자기'가 없는 사람.
'자기'가 없기에
대상이 보여야 '자기'를 겨우 감각할 수 있는 사람."

이것은 순전히 아기 마음이었지만
아기가 아닌 어른이 아기의 마음에 지배당하고 있기에 나타나는 비극이었다.

원초적인 감각,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고 논리로 이해되기 어려운, 그 절박한 마음의 지점이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를 졸졸 쫒아다니게 되는 그 아기 마음이,
내 안에서도 찾아졌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스토킹 중이었다.

받아줄 수 없는 마음, 받아주어서는 안되는 마음이었지만
어떤 마음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지평이 열리면
한계와 틀을 세우기가 더 쉬워지는 면이 있었다.

왜 그러는지, 조금 더 알게 되면
왜 안되는 지,를 조금 더 분명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 가까운 것을 설명해내려는 시도들은 그렇게 우리를 살린다. 자기 언어를 갖는 다는 것은 그렇게
막힌 것이 뚫리는 일이었다.



3.

처음 책을 출간하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나의 가장 열렬한 독자였다. 엄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세속적이고 세상 물정에 밝고 현실의 관점에서 현명하고 똑부러진 사람이었는데(그리고 심리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는데), 갑자기 심리학 작가가 된 딸의 책들을 읽기 시작하시더니 심리학이라는 세계에 푹 빠지셨다. 결국에는 사이버 대학에 등록해서 가족상담학을 전공하시기에 이르셨다.


엄마는 공부 한이 많은 분이셨다. 태어나자 마자 엄마가(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집이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12살에야 학교를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또 그 해에 아버지 마저 돌아가셨다. 엄마는, 중학교라도 잘 가보겠다고 작은 마을에서 시내에 있는 큰 학교에 가겠다고 집을 나가기도 하셨다. 결국 큰 오빠에게 붙잡혀 와서 동네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셨고, 그래서 제대로 공부 못한 한이 크셨다.


그런 엄마가 내가 쓴 책에서 이 문구를 발견하고는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자.아. 실.현. 욕.구."


평생 찾아왔던 문구가 여기 있다며 와서 더 설명을 해달라고 하셨다. 나는 당장 엄마에게 갔었다.

내가 이야기 한 것과 엄마가 이해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학문적 입장에서는 조금 빗겨간 이해를 하시는 듯 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하려 했는데 그러다 엄마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엄마의 삶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너무도 딱 들어맞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설명이 필요해서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공감과 반영이 필요해서 나를 부르신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이해한 그 지점까지만, 함께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하며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세례를 받은 듯한,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 후 심리학 수업을 마친 후에 이런 얼굴을 하고 찾아오셔서 살짝 빗겨난 이해를 짐작할만한 이야기를 하시는 엄마 또래의 수강생 분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백화점 문화 센터나 평생 교육을 하는 도서관 강연에서 많이 만날 수 있다. 우리들의 엄마들을) .

우리 엄마들이 얼마나 못입고 못 먹고 그리고 못 듣고 못 읽고, 무엇보다 못 이야기하던 어떤 그 공통의 시간을 지나왔는지, 내내 그 분들의 마음 속에 눌려있던 마음 속 열망이 무엇인지를 아주 조금은 느끼게 된다.

그럴때면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보다 어떤 것이든 자기 삶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 사실 앞에서 나는 겸허해지고 그렇게 하려던 말을 멈추게 된다.

반만 말해도, 아니 반만 말하는 게 나은 순간이다.



​4.

독자분들의 편지와 엄마들의 달뜬 표정, 상담실에서 내가 써오기도 하고 건네기도 했던 메모들은, 애초에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내가 왜 문학 공부를 하려다가 심리학으로 향했던가를 더 제대로 알게 해주었는데,

심리학이야말로 우리 내면에 부유하고 있는 희미한 말들, 잡히지 않지만 분명 거기에 있는 말들을 하나로 붙잡아 이야기해주는 가장 좋은 학문이기 때문이었다.


나만 그럴 지도 모른다는 좁고 외로운 인식의 벽을 뚫게 해주고 타자에게 향할 수 있다는 그래도 괜찮을 뿐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앎이 주는 자유와 연결감.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연대의 가능성을 공고히 해주는 학문이 주는 자유와 홀가분함은 심리학이 주는 선물이자 위로였다.







상담실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도, 글을 쓰는 과정도 이런 말 고르기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자기 언어가없거나 자기 언어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언어가 있음에도 이를 차마 쓰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언어를 찾고 자기 언어로 말하고 자기 언어의 집을 만들어 자기 공간에 원하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원하지 않는 침해와 상처로 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언어의 집을 견고하게 짓는 일.







내 마음을 내 언어로 발화하는 순간,

다른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것이 내내 내가 하고 싶었던 말, 듣고 싶었던 말임을. 말하면서 내가 내뱉는 말을 내가 들으며 비로소 내 안에 제대로 접속하게 된다.





자기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이토록 짠하고 찡하고 울컥이는 일인데



말하고 말할 수록 어딘가에 근접해 간다는 그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좋아서

말하고 말할 수록 어딘가 헛헛해지는 그 느낌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싶어서 나는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일련의 과정을 계속한다.



자기 언어를 가진다는 것,
그 단단한 내면의 힘에 대해




글. 글쓰는 상담심리사 선안남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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