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서 해낼 수 있었던 일

신입 디자이너에서 콘텐츠 디렉터가 되기까지

by Anna

24년 9월 초, 갑작스럽게 모델+연출 영상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고 급하게 준비하여, <6개의 영상과 몇 가지 사진>을 하루에 몰아서 촬영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몰라서 아무런 준비 없이 눈물과 함께했던 촬영이 어떻게 성공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장소모색


이 브랜드가 비건 뷰티 브랜드지만 그렇다고 식물이 여기저기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우드톤의 가구는 너무 주황빛이 돌면 안 된다.

클렌저가 주력 제품이기 때문에 적당히 깔끔하고, 브랜드 무드와 어울리는 세면대가 필 히 필요했다.


세면대나 화장대, 화장실 같이 거울이 필요한 촬영은 장소를 고르는 것이 2배는 더 까다롭다.

거울 속의 배경까지 촬영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문래동에 위치한 한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기로 결정하였다.


문래동 스튜디오 > 세면대 / 욕조 / 소파 / 침대 / 부엌 정말 다양한 스팟이 있어 다양한 촬영하기에 좋은 곳이다.

당시 촬영은 영상에 초점이 맞춰진 촬영이었기 때문에 스튜디오 선택에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 답사를 다닐 시간도 없어서 현장 이미지를 구석구석 살펴봐야 했다.

(사실 인터넷에서 보는 스튜디오의 컨디션만으로 촬영을 결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부동산에서 7평짜리 원룸도 그럴싸한 20평짜리 넓은 집처럼 보여주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말이다.)




촬영 기획


스튜디오가 결정되자 스폿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욕조에서 스무디를 먹는 영상 / 소파에서 초록색 아사이볼을 먹는 영상 / 침대에서 팩을 하는 영상... 등 정제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졌고, 그 내용을 정리하고 기획하여 그에 맞게 필요한 소품들을 준비해야 되는 것은 전부 내 몫이었다.


한 영상을 촬영할 때 준비돼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만약 스무디 마시는 장면을 촬영한다면,

1) 촬영기획 : 단순하게 스무디 먹는 걸 찍으면 끝 아닌가 싶겠지만 절대 아니다.

a. 모델이 스무디를 바라보면 장면 > b. (클로즈업) 스무디를 잡는 손 > c. (풀샷) 스무디를 몸 쪽으로 가져오는 모델 > d. (클로즈업) 스무디를 마시는 모델

이렇게 4 장면으로 쪼개질 수 있다. 장면이 다양할수록 촬영의 내용과 퀄리티는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15초 정도의 영상을 찍는데 15 씬에서 20 씬정도로 기획하는 편이다.)

2) 소품 : 모델 의상, 스무디, 스무디를 담을 컵, 수건, 주변 소품(빈티지 책, 몇 가지 제품), 선반 등 촬영 기획 이후 주변에 필요할 소품들을 구비해야 한다.

3) 모델 헤어, 메이크업 : 욕조씬이기 때문에 웻헤어(하지만 떡져 보이지 않는 선에서) 피부는 잡티가 살짝 보이는 정도의 맑은 느낌, 립은 컬러가 아예 없는 수준으로 자연스럽게..


모든 영상마다 이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당시 내가 준비했던 기획안이라고는 대표님이 쏟아냈던 아이디어에 어울릴 것 같은 레퍼런스 한두 개 찾아뒀던 것이 모든 영상의 촬영 기획안의 끝이었다.

촬영 당일에 준비됐었던 기획안, 지금 생각해보면 이 기획안으로 촬영을 완결한게 기적이다.



촬영


현장에서 본인만 믿으라고 호언장담했던 촬영 감독님의 말에 홀려 믿음을 갖고 현장에 도착하였지만 기획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겠냐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웃음만 나오는 상황이다.

조명 스텝, 촬영팀, 조연출팀, 모델, 매니저 등등 10명이 넘는 인원이 모두 나를 바라보며 "저희 뭐부터 찍어야 돼요?"라고 묻는데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몇 개의 영상은 필요한 씬 리스트라도 작성해 왔기 때문에 그 영상을 촬영하는 동안 촬영팀 PD님과 러프하게 나머지 영상들의 기획안을 짜내어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촬영 기획과 디렉팅만 해도 벅찬 일인데, 씬마다 필요한 제품 프랍*, 현장 스타일링**까지 하고 영상 촬영을 하는 동안 한쪽에선 이미지 촬영도 동시에 진행됐고, 디렉팅과 스타일링까지 함께 진행했으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다.

*프랍 : 촬영 제품 제형을 예쁘게 만지고 다듬거나 먼지를 닦고, 촬영하기 좋게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스타일링 : 가구를 옮기거나 촬영 소품들을 적재적소에 위치시켜 현장을 촬영 의도에 맞게 꾸미는 작업을 말한다.


촬영장에서 디렉터가 정신을 부여잡지 못한다면, 촬영이 꼬이기 시작한다. 내가 정신이 없으니 촬영 감독님, 조연출, 나조차도 뭘 찍고 있는지, 뭘 찍었는지, 뭘 찍어야 되는지 모르는 대혼돈의 상황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를 위해 모두가 모였을 때, 난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 엉엉 울었다.

준비된 것이 없어 걱정하는 내게 본인만 믿으라던 감독님, 신입 디자이너인 나를 혼자 방치시킨 회사, 철저히 준비하지 않고 안일하게 타인만 믿은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을 한탕 흘리고 한껏 차분해진 마음가짐으로 이면지에 급하게 작성했던 촬영기획안과 함께 감독님과 앞으로 찍어야 되는 촬영에 대한 교통정리를 확실하게 하였고, 총 14시간의 촬영을 무사히(?) 완료할 수 있었다.


6개의 영상 중 하나의 영상입니다. 다른 영상은 @visual. archive_an 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촬영 그 이후 이야기


이 날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사실 영상 하나 찍을 때, 특히나 모델이 있는 촬영은 최소 3-4시간 정도는 걸린다. 6개의 영상을 3시간으로 계산해도 벌써 18시간인데, 이미지 촬영까지 진행하고 14시간 만에 완료하였으니 얼마나 휘몰아쳤던 촬영이었을지 아는 사람들은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재밌는 건 이 날 찍은 영상을 레퍼런스 삼아 유사하게 찍고 싶다고 하는 타 브랜드들의 러브콜이 많이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 결과물이 좋았던 것 같아 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촬영이었다.


사회초년생인 내게 정말 큰 고난이었지만 돌이켜보니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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