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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온 Apr 11. 2021

미나리 원더풀, 원더풀 미나리

영화 '미나리'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보고 싶었던 수많은 영화들을 핑계로 미루며 지나 보내거나, 혹은 스크린이 아닌 모니터로 만났다. 새삼 그 시간 동안 영화관이라는 장소가 그리워졌다. 어두운 적막 속 눈으로 가득 들어오는 유일한 빛인 스크린과 공간을 채우는 사운드, 그 공간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 아닐까 싶다.


개봉날을 외우고 있을 만큼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이러다 또 영화관에서 내려가겠다 싶어 급히 보러 갔다. 연일 이어지는 수상 소식은 궁금함을 배가시켰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주목받는 배우가 윤여정 배우라는 포인트가 제일 이끌렸다. 젊고 인기 있는 주연 배우들만 주목받는 업계에서, 굳이 역할을 나누자면 조연인 연륜 있는 배우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새삼 반가웠달까.




영화는 잔잔했다. 어느 한 가정의 일상을 엿보듯, 소소하고 반복되는 단조로움이 하루하루를 채웠다. 사실 모니카와 제이콥의 한국에서의 삶이라던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길 바라며 미국으로 넘어오게 된 이유라던가, 벌어 놓은 그 많은 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순자는 미국에 오기 전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폴은 왜 그런 이상 행동을 하는지, 농장은 성공했는지, 순자의 건강은 회복했는지, 그래서 아직도 같이 살고 있는지. 이런 인물 개개인의 역사나 뒷이야기는 모두 생략되어 있다. 궁금함이 가득 쌓이지만, 그런 디테일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평범함을 마주한다. 각자가 어떤 역사를 안고 살아왔든 간에 영화 속 지금의 말과 행동 그리고 순간들은 언젠가 겪어 본 나의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 누군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서사보단 언젠가 한 때 한 순간의 토막을 꺼내 펼쳐 보여주는 것 같은 영화였다.


그래서인지, 좋았던 장면들도 다 소소한 순간들이다. 무서워하는 데이빗을 순자가 안아주며 속삭이는 순간, 미나리밭에 같이 가 미나리 원더풀을 외치던 순간, 바닥에 다 같이 잠든 가족을 순자가 바라보는 순간. 그리고 제이콥과 데이빗이 함께 미나리 밭에 가는 순간..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이 잔잔함을 반짝거리게 했다.

영화에서 사건들은 갈등의 요소보다 오히려 가족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갈등의 순간, 위기는 오히려 가족들이 바닥에서 서로 연결되어 단잠에 빠지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면서도 묘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란 존재가 그러하듯.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한예리 배우의 노래와 함께 풀벌레 소리가 영화관 가득 채워진다. 모두가 나간 빈 관에서 혼자 앉아 그 풀벌레 소리를 듣는 순간이야말로 특권이 아닌가. 풀벌레 소리의 여운을 가득 담아오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이유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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