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하기] 눈사람 여관 - 실패를 도모하는 실패

by An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에요


밥은 더러운 것인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숙박을 가요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서


모든 계약들을 들여놓고

여관에서 만나요


탑을 돌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지요

길 건너편 숲조차도 사라지지요


등 맞대고 그물을 당기면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여관이겠어요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눈사람 여관_이병률(문학과 지성사, 2013)


이병률의 시는 쓸쓸하다. 그가 대상을 진심으로 치밀하게 그려내는데 성공해서 그 쓸쓸함은 더 깊다. 시인은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다.

시인은 금방 녹아내려 내 눈앞에서 사라질 거 같은 '눈사람'을 굳이 데리고 여관에 간다.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다. 눈사람에게 아침은 위험한 시간대다. 햇볕이 내리쬐기에 눈사람의 육체는 흘러내리기 쉬워진다.

그는 사랑이 허사가 되지 않는 방법을 철두철미하게 아는 듯 하다. 그러나 그는 '아침'이 올 때까지 사랑을 억지로 붙잡아 놓지는 않는다. 시인은 눈사람을 여관에 데리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그러나 '눈사람'은 시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17행 7연이 층층이 쌓여 짓누르는 18행('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이 견디는 무게는 시인의 눈사람이 갖는 무게와 다르지 않다.

사랑은 혼탁하다. '밥은 더러운 것인가/맛있는 것인가',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를 조금 알 거 같아서, '계약'들을 들고 눈사람을 만난다. 계약은 명석판명한 과학적 논리에 근거한 게 아니다. 그가 ‘들여놓은’ 것들은 파국을 예감한 불안한 영혼이 끝을 유예하려는 시도다. 그래서 그에게 쉽게 녹아내리는 눈사람의 육체성은 '온갖 형식의 사랑, 괴로움, 광기'(바타유)으로 자신을 고문하는 것과 같다. 이별의 유예 뒤엔 감정의 불모만 남는다. 여관 앞에서 발견한 애인은 온갖 사건들이 착종되어 '목격'되는 현장으로 뒤바뀌고, 반가움이 있을 곳엔 서운함이 자리한다.

시인은 애인을 붙잡아 놓기 위해 여관에 간다. 시인의 다짐엔 거짓이 없고, 이별을 막으려는 투명함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원(한 이별)은 찾아오고, 달에는 구름이 드리워진다. 이별 뒤에 그는 '연한 달이 독신이 그만두기'까지 '나흘이면 되겠네요'라고 담담히 예측한다.

아침의 풍광과 여관의 폐쇄성은 미묘한 관계를 맺는다. 여관은 안전하지만 언제든 떠나야하는 불안정한 공간이기도 하다. 여관을 수없이 오갔던 시인은 '길 건너편 숲'이 사라지는 걸 '목격'했을까. 폐쇄됐던 사랑의 잔재가 개방이 될 때, 달이 내려가고 아침이 올 때, 눈사람은, 애인은 사라졌을까. 언제나 사랑은 붙잡히지 않는다. 실패를 도모한 실패는 그렇게 성공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실패로서 성취된다.

이병률의 시는 단박에 사랑을 지키려는 애먼 몸부림과 그 실패를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여관에서 나온 우리는 시인이 말을 끝맺지 못한 폐허 앞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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