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이 갖는 순결함을 사랑하였지만, 사실을 분석하려는 과학의 단순함은 경멸하였다. 이십대의 적지 않은 시간을 과학적 글쓰기에 복무하였지만 나의 한계 때문에 억압의 세계를 토막난 문제의식으로 분류하는데 그쳤다.
기사가 갖는 특성 - 자아가 갖는 모든 고뇌를 봉쇄하려는 시도 - 은 나의 강박적인 글쓰기로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이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새롭게 부상하는 문화비평의 코드들에서 나는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자연과학 등 과학을 읽는다. 여전히 철학과 미학, 문학 일반에 대한 논의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기호학이나 정신분석을 통해 단일 대오를 이루는데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러한 구조주의적 접근이 나의 경계면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한때 열렬한 러시아 형식주의와 소련 구조주의의 신봉자였고, 기호학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러시아 문학사가 갖는 정서는 내가 세계를 이해하는데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개념어이자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분석은 저변에 깔려 있는 문제를 추문으로 만들지 못하고, 정신의 고통을 고통으로만 기억한다. 사람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고통을 겪는 사람의 심리에도 희망이 깃들 수 있고, 어떤 경지에 이르러 초연한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다급했던 순간이 있을 터이다. 나는 작가의 말 뒤에 켜켜이 쌓여 있는 말하지 못한 시간들에 언제나 눈길이 갔으며,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사실이라고 믿었다.
이미 안전을 택해 살아가는 현명한 사람도 있지만, 기약 없는 땅으로 제 손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나는 그 사람들의 결단 이전의 망설임을 읽으려 한다. 주체의 의지만 읽을 때, 우리는 과학의 모순에 빠지고, 주체의 분열을 읽을 때, 우리는 문학을 조금 믿게 된다고 감히 여긴다. 그리고 웅숭깊은 주체의 고독이 쌓인 시간을 읽을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Sein)의 사실을 포착한다.
나는 환상을 읽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사실을 찾는다. 객관적 현실이라는 익숙한 허구는 황폐함을 마주하려는 주체를 차단하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환상도 아니고, 주관도 아니다.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대에 갇힌 인식일지언정, 객관성은 인식조차 유폐시킨다.
'시'가 현실을 드러내는 언어의 맨 앞에 놓여진다면, 언어의 규격을 깨뜨리는 시도를 하는 실험이라면, 시의 이미지는 단일화되지 않는다. 하나의 이미지는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하게 얽혀있는 덩쿨과도 같아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성복의 '남해 금산'과 이병률의 '눈사람 여관'을 용기내어 읽고서도 내 분열된 자의식이 빚어내는 비루함과 무능함으로 어떤 논의에 교착되어 단일한 말들만 쏟아내었을 뿐이다.
나는 짧은 시 앞에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를 마주치는 순간, 숨 막히게 불행한 역사를 감당하려는 내면만이 포착되었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과학으로 사실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멈출 수 있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비로소 사소한 답답함을 안고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졌으나 실패했다고 할 순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