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기] 삶의 오욕, 세부, 영광

영화「남한산성」

by An

나는 어둡고 미천한 무식자(無食子)라 말하기를 주저해왔다. 어느 평론가의 말따라 내가 훤히 아는 바에 대해선 언어가 거칠었고, 형용하지 못할 말을 꾸며낼 땐 논리가 성글었다. 논리가 세워지면 듣는 이로 하여금 차디찬 일갈로 바뀌어 불쾌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매일 글을 조금씩 쓰고 있으니 이것은 말하기나 다르지 않다. 나는 말하기를 실천하면서 죄를 짓고 있으니 삼가 괴롭다.


나는 추상과 현실의 전쟁 속에 휘말려 살았다. 대학 공부를 시작한 후로 관념화된 언어를 삶의 구체성으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데 성공시켜 수치화되지 못하는 모든 세계의 표현에 진실을 하나 덧대려고 했다. 학생기자를 했던 것도, 문학과 문화비평을 공부한 것도 잘 싸우려는 일환이었다. 감각을 감성으로, 감성을 언어로, 언어를 활자로 옮겨 명료하게 표현하는 시도는 세계를 설명해내고 싶은 나의 욕망에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시제로 남게 된 나의 말로 짐작하시듯이, 볼품없는 나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세계에 퇴적된 존재의 시간을 들여다보고, 삶의 맥락으로,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환원시키려는 나의 시도는 비약이었을 수도 있고, 오독이었을 수도 있다. 삶의 일부는 여전히 삶 속에 숨겨져 말하여지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남한산성」 을 보며, 나는 괴로워했다. 역사의 평가는 현재진행형이지만, 나는 최명길이 제시한 삶이 치욕과 부대낄 때 가능하다는 주장에 조금 더 고개를 기댄다. 그러나 김상헌이 제시한 온전한 삶을 위한 저항도 끄덕거리게 된다. 결국 역사를 두려워하는 임금으로서 생(生)의 길을 택한 인조의 무력한 분노도 나는 긍정한다. 「남한산성」은 치욕도 삶의 일부라고 내게 가르쳤다.


그러나 치욕은 말하여지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으로 남은 우리 선조의 치욕을 나는 긍정한다. 선조의 치욕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의 당대인에게도 유효하다. 삶은 오욕과 영광이 씨줄낱줄로 엮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이 뒤섞여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소주 한 잔 부으면서 무어라무어라 쏟아내다가도 다음 날이면 참회하고,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다시 부어라 마셔라 쏟아내니 이것은 삶의 일부인 동시에 생명력이다.


문학은 삶의 세부를 성실히 기록한다. 여전히 나는 추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투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세계를 설명하려고 매만졌던 기자의 언어를 벗어던진다. 조금씩 나는 치욕의 희망마저 기록하는 문학으로 발을 옮긴다. 아, 「남한산성」의 가르침이 내게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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