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기] 쌀과 예술

청년 이진원, 청년 이중섭 그리고 청춘

by An

모든 문제의 시원(始原)에는 쌀이 있다. 쌀이 있어야 질문이 나오고, 쌀이 있어야 대답이 나온다. 쌀이 있어야 지각을 통해 개념이 형성되고, 쌀이 있어야 개념을 통해 이론을 창안한다. 쌀이 있어야 이론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고, 쌀이 있어야 세계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따를 수 있다. 쌀이 없는데 애국하라고 말할 수 없다. 쌀은 힘이 세다.


쌀은 열망을 불러들인다. 열망은 미와 숭고로 구분되는데 학자에 따라 뒤섞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열망은 슬픈 것이 아니다. 쌀이 없어 보냈던 어두운 시절도 슬픈 것이 아니다. 청춘은 어둠을 무한히 기억할 때 어두워질 수 있다. 이 말은 철들지 않아야 철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의 동어반복이다. 청춘은 열망이고, 나는 그러한 열망이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이 말은 자기 길을 찾아간다는 것의 다른 말이 아니다. 청춘이 제 길을 간다는 말은 호사스러운 사치로 비치지만 청춘은 제 어둠으로 파고 들어갈 때서야 완성된다.


나는 길을 잘못 든 청춘에서 언제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가수 이진원, 화가 이중섭은 살아있는 청춘이며, 우리는 그들의 생명력에 기대어 공동체를 영위하고 있다. 이 말은 비약처럼 여겨지겠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호명(interpellate)한 주체의 자리를 거부하고 고유한 양식으로 현존재(Dasein)로 곁을 지지하는 그들의 예술 작품에게 우리는 많은 빚을 지고 있으니 나는 사실을 기술할 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련다.


이진원은 왜 계속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음반을 냈을까, 이중섭은 자신이 멀쩡하다는 근거로 왜 미술을 여전히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을까. 나는 이 두 가지 질문 앞에 발을 동동 구르며 엉엉 울었다. 쌀사태 앞에 그들은 존재 양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명석한 과학으로도 판명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숭고함을 느낀다. 나는 천박하고 비열한 청년이다. 현실의 두터움을 모질게도 납작하게 이해해 스스로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어느새 나는 유폐되어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나의 죄는 무겁다.


모든 예술의 始原에는 인간이 있다. 휴머니즘을 운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쌀은 영구한 문제였다. 나는 쌀 앞에서도 예술이 포기되지 않음의 윤리라는 것을 보여준 청년 예술가들의 청춘에 질투를 느낀다. 그 윤리는 삶에 관한 것이며, 결국 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예술은 연약하고 정열은 때때로 쉬어지나 오래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는 패배하지 않는다. 현실과 드잡이질하는 청춘을 보며 나는 조용히 탄식했다. 아, 예술은 힘이 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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