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옆 동네로 전학을 가자마자 나는 작문 시험을 쳤다. 옆자리 친구에겐 담임선생님의 칭찬과 보상이 주어졌다. 어린 꼬마는 칭찬이 부러웠다. 조그만 학교 도서관에 매일 들렀다. 나는 거기서 글 잘 쓰는 법을 고민하다가 사서에게 책 안 읽을 테면 나가라는 말로 혼이 났다.
지금도 나는 내 글을 인정해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글쓰기를 나의 콤플렉스로 여긴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면 방에서 역사책만 뒤적이던 내게 아버지는 서재에 있던 국어사전을 하나 선물해주셨다. 또 어느 날, 사전의 마지막 장에는 내 생일 바로 직후에 발행된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성인이 되고, 불안한 영혼에게 사전은 진지한 대화 상대였다. 대학생 시절에 학생기자로 기사나 칼럼을 쓸 때면 선배들이 가르쳐준 인터넷 동의어/유의어 검색 사이트를 이용했으나 알쏭달쏭할 땐 사전을 펼쳤다. 문학 이론 공부를 할 때는 해설서와 사전이 즐거운 수다쟁이로 변신했다. 교정에서, 편집국에서, 도서관에서, 내 가방에 늘 함께였던 계간지 한 권, 대학노트 한 권, 국어사전 한 권.
졸업한 후에도 여전히 나는 비근한 어휘로 곤핍하게 문장을 밀어낸다. 자신감이 부족한 내게 사전은 나의 유일하고도 탁월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2025년, 언어 모델 AI가 다양한 어휘들로 문장을 구사해준다고 한다. 그 AI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빈곤하다. 나는 AI를 쓰지 않으려 하지만, 나의 학습 속도가 AI를 능히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AI는 대화 기능이 있어 사람들의 유용한 친구가 되어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AI를 이용해본 나는 생경하다. AI의 말은 정확했고, 완벽한 주어와 술어, 보어를 구사했다. 그 거대한 존재 앞에서 설명할 말을 찾으려고 시간을 쓰고도, 불안한 문법을 직조하는 내 자신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AI 사이트를 모니터에 켜놓고, 나는 90년대 발행되었던 국어사전을 뒤적거렸다. 200자를 겨우 쓰고 AI에게 분석해달라고 요청했다. AI는 다각도로 나를 분석했다. 그러고선 문법이 불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에 집어넣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게 됐다. 그게 내 언어라는 걸.
나는 문장이 기술이라고 믿지 않는다. 아직 나는 사전을 고집한다. 내게 사전은 말벗이다. 그런 사전을 끼고도 나의 언어는 안정되지 못하여 어떤 법칙에 항거하고 있다. 사전은 내 언어의 반항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종이 사전은 낙후됨의 상징이 될 테다. 그러나 사전은 끊임없이 언어와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나침반이 되리다. 나침반의 지남철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신영복)는 말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