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하기] 나와 정신질환

by An

조금 엄살을 부리자. 나는 양극성 정동장애 II형(조울증이라고도 한다), 공황장애, 불면증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느 날부터는 몸이 쿡쿡 쑤시고, 끔찍하게 아플 때마다 큰 병에 걸린 건 아닌지 공포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짓눌리기도 한다.(호들갑은 심하다.) 정신질환이 건강염려증을 낳고, 건강염려증이 다시 정신질환으로 순환하는 길목에서 나는 일상을 가히 영위하기 어렵다.

일상을 잠식하는 만큼 나는 나의 질환에 대해 침묵하기가 어렵다. 내 질환은 나를 비추는 하나의 프리즘이다. 나는 읽고 쓰는 일에 큰 기쁨을 느끼는데, 이마저도 되지 않을 만큼 아팠을 때가 생생하다. 그 기억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아 강박적으로 더 읽고, 쓰려고 펜대를 붙잡게 한다. 글잡이질을 하루라도 거스르면 나는 자신을 혹독하게 저주한다. 그러나 병을 선고받고 살아온 지 3년, 나는 무엇을 이뤘는가. 글은 하루하루 휘발되고, 사유의 축적은 내재적이므로 내게 오롯하게 남은 건 병 하나뿐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러한 사태를 불우하다거나 축복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내가 가진 질병의 가장 큰 특징은 충동이다. 다스리기 어려운 화, 억압하는 슬픔과 무기력, 그 간극에서 흔적으로 남는 주저흔, 과도한 에너지와 소비욕구, 다음날의 참회. 이렇게 적어보니 다소 멀쩡해 보이진 않지만, 뭐 어찌하랴. 나는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생각하며 조율하는 법을 터득하고 거리 두는 방법을 배우며 일상의 궤도로 나를 올리고 있다.

내 하루는 정신이 괴로워지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이겨내고 나면 나는 갖은 체력 소진으로 지쳐 쓰러진다. 그때마다 탁상에 고개를 처박고 흐느끼는 병신 같은 짓을 반복한다. ”하루만, 단 하루만 더 살게 해 주세요. “ 그렇게 삼 년을 살아냈으니 이건 기적이 아닐까. 이제는 책을 뒤지며 대단하고 멋진 연구자와 작가들이 남긴 글의 길을 따라가며 소소하게 기뻐하고, 불완하지만 무언갈 매일같이 쓸 수 있으니 이건 큰 축복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질환의 증상을 나열해 봤자 이해할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건 말해도 말해지지 못한 고통에 속한다. 그러나 우매한 내가 믿기론 문학이란 고통을 응시하는 공부이며, 문예란 어찌할 수 없는 언어로 사회문화적 토대와 역사의 텍스트를 약간 비껴나가 그 고통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증명하는 장르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나는 문학에 복무하고자 자원입대를 신청했다.

내가 쓰는 글은 영영코 문학이 되진 못하겠다. 나는 무학자(無學者)이며, 몇 명의 이론가를 탄복하는 편향되고 그릇된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 그게 문학을 하는 것과는 별개지만, 내게 학술 이론의 토대도, 문재(文才)도 없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특출 난 문예가가 되려고 쓰는 게 아니다. 이 시간을, 오늘을, 나 자신을 위해, 살기 위해 쓴다. 능력이 닿는다면 다른 이들을 위한 글도 쓰고 싶을 야망과 함께.

주말 동안 오랜만에 귀한 선배들과 만났고, 모 업체와 사진전을 준비하는 친형의 전시 기획 구성과 텍스트를 크리틱 하며 즐겁게 소일했다. 오늘은 다음 주 동안 매일 쓸 [종단하기] 계획을 짜고, 문화학과 바흐친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아침에 커피를 사러 나갔다가 돌아오며 농촌의 광경에 잠시 눈물이 흘렀다. 슬픔은 억압이지만 그 뒤로 보이는 풍경은 순결했다. 나는 순결한 시공간에서 젊은 순간을 보내고 있으니, 붙잡아도 잡히지 않는 이 젊음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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