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대학시절

[대학시절] 에필로그

읽는 인간이 쓰는 인간이 되었던 이야기

by An

바흐친의 저작들은 한국에서 1990년대에 대체로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절판되었다. 그래서 나는 저 인문자료실 800번대 중에서도 끄트머리로 가야 그의 저서를 찾을 수 있었는데, 이는 몹시 흥분되는 일이었다. 독서대를 펼치고, 책 한 권을 고른 다음, 노트북에 워드를 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한 문장씩 옮겨 적었다. 매일 그러한 일을 반복했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프린트해서 다시 읽으며 복습을 했다. 때론 러시아어로 적힌 마야꼬프스키의 시를 어줍잖은 실력으로 번역해 러시아어에 능통한 노문과 학생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학문에 대한 욕구는 어느새 7년의 세월을 교정에서 허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남루한 현실에 인문학 공부는 나의 탈출 전략이었다.


그때는 감히 과제 외에 비평적 글쓰기를 해본다는 것에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비평이란 걸 할 자질이 되진 못하지만 감상문이라도 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이론을 공부하고 작품에 적용해 분석하는 과정은 단순히 형식적 틀에서 사고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돋보기가 내 손에 쥐어진 느낌과도 같았다. 그 경험은 학부시절 내게 중요한 경험이었다. 나는 지금도 학부시절 때 읽었던 강의록을 프린트해 갖고 다니며 다시 읽어보고, 새롭게 읽어볼 만한 평론집이나 이론서를 구입해 발췌독한다. 러시아 문학이든, 사회비평서든, 미학이론서든, 책을 구입할 때마다 나는 엄정하고도 인자한 선생님 밑에서 다시 공부하게 되는 듯한 학부시절의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그러한 경험을 사랑했다.


나는 여전히 이 한국을, 세상을 알지 못하고, 무언가 알려고 하는 인간이다. 그런 내가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한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현실의 두터움은 그 사람이 겪는 만큼 결정되며, 감수성의 질은 그 두터움에서 비롯된다. 나는 미문을 쓰지 못하고, 건조하고 까칠하게 쓰지만, 사회적 감수성을 잃고 싶지 않다. 꾸준히 예민한 촉수로 사회문화를 감각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함께 고민하는데 일조하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그게 대학 공부를 한 내가 해야 할 책무라고도 생각하니 어쩌면 오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속 편한 추상보다 불편한 내 이야기를 꺼내게 됐다. 나는 언제나 나다. 어두워 보인다면, 그게 나다. 지나치게 진중해 보인다면, 그게 나다. 내게 학문이 비중이 커 보인다면, 그것도 나다. 인문학은 위태로운 정신을 붙잡게 만드는 채찍이었고, 내가 나를 놓지 않게 동여맨 질긴 끈이었다. 내게 인문학은 끈질기게 싸우고 붙잡고 지지고 볶아야 하는 무언가였고, 고행을 견디게 해 준 벗이었다. 인문학의 실천, 언어의 실천으로서 글쓰기는 나에게 필연이었다.


나는 그렇게 도서관에 기대 문학 작품을 읽던 소년에서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건 내 덕분이 아니라, 내 곁에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였다. 내 친구들은 독서량의 정도와 별개로 삶의 여러 방식을 가르쳐주고, 인격적인 성장을 돕는데 의지가 되어주었다. 그건 행동으로서 인문학이었고, 나는 그러한 인문학을 더 아꼈다. 행동과 실천으로서 인문학을 하지 않으면 나는 절반만 사는 꼴인 셈이다.


7편의 글이 다소 무겁게 쓰였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기록인 만큼 꾸미지 않았다. 이것도 회고를 통한 재구성이니 완벽한 사실의 기록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실에 가깝게 쓰려고 노력했다. 오히려 말함으로써 말해지지 못한 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건 나의 또 다른 실패겠지만, 겸허히 받아들이리다. 연재를 읽어봐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An 올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대학시절] 결심의 되돌이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