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대학시절

[대학시절] 결심의 되돌이표

고단한 삶에서 열망을 갖다

by An

신문사를 마치고, 학회에 들어간 나는 귀한 선배를 만났다. 나를 보이는 그대로 날카롭게 해부해 주는 선배였는데, 형으로부터 인격적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학회에 있는 동안 나는 네 번의 의학 페이퍼를 쓰고 발표했다. 칼럼을 기고하고, 5급 법원행정사무관을 준비하기도 했다. 학술언어와 저널리즘, 법학 논술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는 다양한 언어 방식을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돈이 많이 들어가는 공무원 시험은 포기했고, 의학 지식이 부족했던 나는 학회 의무학기만 채우고 수료했다. 저널리즘 글쓰기는 하면 할수록 세상을 단면적으로 드러내는 거 같아 답답했다.


아버지의 병세 악화는 경제적 여건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내가 매달렸던 인문학 공부를 그만두고 빨리 취업할 수 있는 길을 원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공부하기 위해 6학년까지 다녀, 첫 대학까지 7년을 학부생으로 이미 보낸 상황이었고, 군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정규직을 현실적으로 구할 수 없었다. 어찌저찌 기획을 하고 연재 칼럼을 냈지만, 딱히 반응이 좋지 않았다. 문학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왜 해야 하는지 여전히 개인의 차원에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증명해야 한다는 건 무엇이든지 괴로운 일이다. 인생에는 기승전결이 없는데, 아픈 사람은 언제나 기승전결에 따른 논리적 귀결을 갖고 자신을 해명해야 한다. 문학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차라리 그저 하고 싶은 거였다면 대답이 편해질 텐데) 문학을 왜 해?라고 물을 때마다 답하기 곤란해하는 자신이 미웠다. 그렇게 나는 문학 연구는 뒷전으로 하고, 혼자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었다. 계통 없이 하는 공부에 편안함을 느끼고, 마음대로 잡설을 썼다.(523편을 썼다.)


대학 내내 지위를 갖다가 학생 신분을 잃게 되니(졸업했다는 뜻) 나는 초라했다. 인턴, 계약직에 서너 번 붙기도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취소하다 보니 무경력자가 되어 버려 나는 무직 백수로 전락했다. 그럴수록 가정에 대한 부담감이 커져갔다. 3년째 무직으로 글만 쓰고 허송세월하니 때로 허탈할 때도 많았다. 나는 가슴속에 말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거 같았다. 달리고 싶은 말, 달려야 하는 말, 그러나 갇힌 말, 달리지 못하는 말, 달리고 싶어 하는 말. 그러나 내게 주어진 광야란 존재하지 않은 상상의 영토였다. 나는 다만 참회하며 읽고 쓰는데 몰두했다. 그게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니까.


읽고 쓰는 게 왜 나의 유일하고 소박한 재주인지 이미 설명했으니 이 글에서는 넘기겠다.([바라보기] 근사한 사람 참고) 하나 둘 취업 소식이 들려오고, 결혼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착잡했다. 내가 잘못 걸어온 것은 아닐까, 깊게 뉘우쳐 보기도 했지만, 내가 뛰놀던 교정을 미워할 순 없었다. 나는 다만 졸업하며 교정에 대해 사랑한다고 적었다. 결국 나는 뉘우치지 못했다. 나는 반성하지 못하는 글러먹은 인간인 거다. 모아둔 돈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나날이 집의 경제 사정도 악화됐다. 나는 눈앞에 닥친 아버지 일을 도와드리고, 글을 보내고, 고마운 친구의 주선으로 과외를 하면서 한 달 한 달을 버텨나갔다. 그런 가운데 알바 자리도 몇 번 떨어지고, 다시 넣기 시작한 서류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삶은 고단하다. 나는 그것을 비루하다거나 남루하다고도 하나 불우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생을 긍정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당장 쌀이 문제가 되니 나는 군이라도 입대해 장기복무를 하여 살아야겠다는 불온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 달을 고민하다 결국 포기했지만, 가끔 아직도 가지 못한 시험장이 눈앞을 가린다. 나는 미련하다. 나는 그런 가운데서 꿈을 되찾았다. 결심은 돌고 돌아 비평을 쓰고 싶단 생각으로 돌아왔다. 왜 비평인가, 작품을 보고 듣고 읽으며 얻은 가치가 사회에 유효하다고 믿기에, 비평을 쓸 수 있나, 그건 잘 모르겠다. 내가 하는 게 비평인지 나는 사실 잘 모른다. 그냥 학부생 때 끄적인 것의 연장선상에서 쓰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 건 그 끄적임이 나를 지금껏 살아내게 하고 있단 사실이다. 정신질환이라는 나의 개인적 경험이 사회문화를 읽는 코드로 바뀌어 문화현상의 이면을 번역할 때, 그리고 그 번역이 글이 되어, 누군가에게 닿아 연결될 때, 연결이 연대가 되어, 통계로 얼룩진 공동체의 서사를 회복할 때, 나는 나를 긍정할 수 있다. 무겁게 느껴지거나 조금 뒤틀리게 보이겠지만, 모든 생각과 발언과 행동이 병의 증상이라고 의사가 진단하는 나의 개인적 경험이니 양해해 달라. 그건 통계가 가르쳐주는 충격이 아니다. 너도 그 아픔을 겪는구나, 나도 그랬어. 말하지 못한 상처가 이 문장에 담겨 있구나, 할 때 오는 공감의 힘은 세다. 고통에 대한 응시는 위로가 된다고 확언할 수 없지만,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러다 언어의 최전선인 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언어 미학으로서, 또는 언어학적 실험으로서, 또는 언어 이상의, 그 너머의 것으로서 시는 존재를 말하고 삶을 말한다. 나는 시의 말하기를 통해 예술의 윤리를 감각하고, 공동체의 윤리를 짐작하게 된다. 이러한 순열조합은 내가 나의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자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 사회에 환원할 인식을 생산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래서 글을 쓴다. 물론 돈이 된다면, 뭐든지 쓰겠지만.


나의 결심은 되돌이표를 찍고 다시 인문학으로 돌아왔다. 사학도를 꿈꾸던 고등학생이 문학소년이 되고, 경제학과, 보건학이라는 사회과학도를 선택했다가, 문화비평학과 노문학을 통해 인문학을 꿈꾸고, 다시 의학과 저널리즘, 논술을 쓰며 학술언어를 생각하다가 인문학으로 돌아온 것이다. 거기에는 불안한 줄타기가 있지만 일관성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글쓰기였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인간을 깊이 믿고 사랑하였기에 가능했다. 나는 사람에 대해 공부하는 게 좋았다. 인문학이 선선한 봄바람을 맞으며 푸른 나무의 일렁임을 바라보는 미적인 쾌로만 다가온 건 아니다. 연민이 아닌 고통에 대한 직시를 요구했기에 인간인 나는 매 순간 한계를 체험하며 공감력과 상상력이 빈곤한 자신을 자학했다. 그 과정은 괴로웠지만, 글이 초고로 나오고, 퇴고를 할 때엔 숭고함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이런 걸 해냈다! 뭐 그런 거였을까.


나는 고단한 삶에서 어떤 열망을 갖게 됐다. 삶을 살아내는 글을 쓰자고, 그렇기 위해선 일단 읽자고, 구체적 현실에 발을 딛고 있자고, 그리고 쓰자고. 언제나 나를 앞세우기보다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비평을 선택하자고. 그게 내가 조그마한 등불이 되어 주변을 밝히는 길이 될 거라고. 그렇게 믿게 됐다. 그건 신앙과도 같은 종류의 것이지만 내가 이십대 내내 놓지 못하는 열망과도 같다. 열병이 되어 아프기 전에, 나는 쓰련다. 종단하기에서, 횡단하기에서, 바라보기에서, 관찰하기에서, 그리고 여러 지면을 통해.


나는 결국 쓰는 사람으로 살아오고 있던 셈이다. 말하지 못한 것들을 쓰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나를 살리고 있었다. 이제 당신들을 위해 쓰고 싶다. 당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나는 이 믿음이 이루어지리라 깊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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