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대학시절

[대학시절] 문학청년의 싸움

학문의 한복판에서 만난 거인들, 다시 도서관으로

by An

매주 3000여 페이지를 읽고 비평 과제를 하다 보니 도서관이나 독서실에 틀어박히는 날들이 많아졌다. 학내활동도 열심이었지만, 도서관에 책과 노트를 들고 공부하던 순간은 내게 숨호흡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4학년까지 마쳤지만, 여전히 내 학구열은 가시지 않았다. 듣지 못한 학부 수업이 많아 보였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새로운 의문, 비평 개념은 알겠다. 그러나 문화비평적 글쓰기란 대체 무엇인가? 비평의 기능은 무엇인가?


다른 여건도 문제가 생겨 한 학기를 유예하게 됐다. 5학년이 된 나는 문화인류학과, 문화비평학 전공, 비교문학 전공과 노어노문학과 수업을 듣게 됐다. 노문과 수업이야 3, 4학년 과목으로 개설되는 대부분의 강의를 이미 들은 참이었지만 기본 토대가 되는 2학년 과목이 궁금해 수업을 추가 신청했다. 문학의 비평 방법론으로 비교문학이 궁금해 두 과목을 더 들었고, 문화비평적 글쓰기를 연습하고자 문화인류학과의 문화비평가 강사님이 가르치는 글쓰기 수업과 문화비평학 전공의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이때는 내게 개인적인 아픔이 이어지기도 했는데, 소중한 친구가 크게 아프다는 걸 알게 되었고,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오래 만났던 애인과 헤어졌다. 학내활동을 하며 속한 조직은 갈등과 혐오로 꼬이고 있었고, 날 예쁘게 봐준 친구와 상처 주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어떻게든 내가 끝까지 책임지는 자리에 있어보려고 했으나, 공동체의 윤리는 적어도 나의 단견으로 보기에 파괴되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 책임을 지기보다 살기를 택했다. 고매한 학문을 추구했지만, 결국 나도 속된 인간이구나,라는 깨달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너졌다. 나는 과제물을 하나도 제때 제출하지 못했다. 내 안의 밤하늘은 별빛을 잃은 채 까맣게 어두워졌다.


교수님들은 그런 나를 걱정 많이 하셨다. 과제 제출 소식이 없어서 그런 거지만, 내게 상담을 먼저 요청해 주셨으니 나는 지금도 감사히 생각한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리니 교수님은 양해해 주셨고, 내가 제출한 글에 가능성을 봐주시고, 문화비평가로, 문화연구자로 나아가길 바란다며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추천서를 써주시겠다고도 하셨다. 나는 당시에 정신질환을 막 진단받아 관리에 들어갔기에 대학원 진학은 고사했지만, 자기 검열이 심한 내게 가능성을 열어주신 교수님들에게 겸손히 고개를 조아리게 된다.


나는 내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지 못했고, 포용하는 그릇을 갖지 못했다. 나는 자연스레 내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해명해 줄 이론을 찾아다녔다. 그때 내 앞에는 두 거인이 내 앞에 있었다. 한 분은 바흐친이라는 러시아인이었고, 다른 한 분은 라캉이라는 프랑스인이었다. 라캉의 텍스트는 기본 개념만 배운 뒤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읽다가 다시 공부하려고 되돌아갔는데, 지젝의 탁월한 문화비평 텍스트는 나를 당혹스럽고 스스로를 저주하게 만들었다. 공동체의 윤리를 묻다가 갑자기 왜 그렇게 라캉에 매달렸는지 그 원인은 잘 모르겠다. 지금도 찾는 중이다. 다만 바흐친은 내게 깊숙이 다가왔는데, 그가 당시 내 나이에 쓴 <예술과 책임>이 칸트를 극복하려고 쓰였다는 전설(!) 같은 일화(사실인지 모른다)와 생활과 예술의 구체적 책임관계를 설명한 게 공동체 윤리를 회복하는데 필요하다고 여겨서 나는 이 사유를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시 나를 무섭게 했던 <러시아문학이론과 비평>을 가르치셨던) 노문과 교수님의 마지막 학부 강의를 다른 두 명의 선배님들과 수강 중이었는데, 바흐친의 주요 개념으로 '비종결성'에 대해 방점을 찍으셨다. 비종결성을 대강 설명하자면,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세력이 완고하고 변화와 변주를 거부하는 집단일수록 균일한 인식체계와 행동강령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도그마에 대한 전복적 상상력이 개체적 자율성을 기전으로 상상력이 발현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착 도모가 계속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굉장히 해체주의적으로 읽히지만, 여기엔 생성의 사유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건 문화 시공간이라는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상과 예술의 구체적 책임관계에서 계속 작동하는 점이다. 나는 이런 사유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바흐친의 제안은 불안에 떠는 섬세한 영혼에게 무너지는 다리 위를 걸어보자는 게 아니었다. 예술과 생활의 책임관계를 얘기하면서도 비종결적 해체를 얘기하는 모순적 이론엔 끊임없이 예술(삶)과 나 사이에서 생성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유였고, 나는 거기에 매혹되었던 셈이다.


바흐친의 사유에 기대어 나는 새로운 전선을 긋고 싸움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어'였다. 어떤 언어로 나를 밀고 나가야 하는가. 어떤 장르의 글쓰기,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이냐, 묻는 질문이 붕괴된 나의 삶과 공동체를 복원하는데 필요해 보였다. 우선 기존에 쓰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나가야 했다. 일단 현대 문화를 정립한 칸트와 헤겔 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고 당장 백기를 들었다. 대신 나는 사회과학의 글쓰기로 저널리즘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조금 더 입체적인 학술언어를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의과대학 학회에 무모하게 지원을 하게 됐다. 우선 과학적 글쓰기의 끝장을 보자! 그게 나의 목표였다. 과학의 한계를 체험하고, 문학으로 넘어가야겠다는 기획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다시 도서관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좁은 서가 사이로 벨린스키, 시클롭스키, 야콥슨, 로트만 등의 러시아 비평가들을 찾으러 뛰어다녔다. 사광으로 젖어든 책상에서 나는 그렁거리며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대학시절] 형식에서 실천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