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도 밟히지마 ep.12]
입사하자마자 잘해준 선배가 있다. 한두 달이었을까? 선배를 따라다니며 나름의 추억도 쌓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선 속도가 있다. 사회생활을 통해 알게 된 건 초반에 아주 빠른 속도로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소위 인싸, 친화력 갑 이런 사람이 내 옆에 있으면 사실 편하긴 하지만, 인생의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처럼 마음을 급하게 줄 필요는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씁쓸하긴 해도 관계에 있어서 경계심은 아주 조금은 필요하다.
선배는 일 관련 이야기보다 본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털어놨다. 더 자주 만나길 원했고 나는 그 선배 하고만 시간을 보내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선배 입장에선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다 알고 있는 상대가 다른 다수의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게 싫었던지 다른 선배나 동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한(?) 나에게 자주 핀잔을 주었다.
“요즘에 좋아 보인다? 신나 보이네 우리 후배님.”
“퇴근하고 거기 놀러 갔더라?! 재미있었겠어 아주.”
불편하고 어려웠다. 자연스레 선배와는 멀어지게 되었고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입사 후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나는 중요한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인지도가 있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부모님도 자랑스러워하셨고 방송에서 날 봤다며 주변 분들의 연락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해진 그 선배가 잠깐만 이야기하자고 나를 불렀다.
“잠깐 화장실에서 얘기 좀 할까?”
학창 시절 무서운 일진 언니(?)들에게도 화장실에 끌려간 적은 없었는데, 직장인이 되어서야 선배 호출로 화장실행 경험이라니! 아무도 없고, 은밀한 장소인 화장실. 그곳에서 선배는 나에게 무슨 할 얘기가 있었을까?!
“네가 지금 하는 그 프로그램, 내가 하면 안 될까? 나는 오래 기다려왔는데 기회가 없었어. 그거 내가 좀 했으면 하는데....”
갑자기 무슨 용기가 났을까? 어려운 선배 부탁이었지만 찰나의 순간에도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옳지 못한 부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타인의 기회를 강요로 빼앗을 순 없다.
“그건 제게 권한이 없어서요. 팀장님께서 저보고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선배님이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 뒤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하나 기억에 남는 건, 선배와 함께 출연했던 녹화방송을 마친 어느 날이다. 평소 셀카를 잘 찍지 않았던 선배는 그날 녹화 후 여자 출연자들과 함께 셀카를 찍자고 했다. 선배 바로 옆에 있던 나는 보이지 않았는지 나를 제외한 여럿이서 보란 듯이 즐겁게 셀카를 찍어댔다.
화장실에도 불려 가봤고 없는 사람 취급도 당해본 건 모두 그 선배 덕분이다. 그 뒤 몇 년간은 선배의 기억이 좋지 않았는데 사실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없다. 그저 나는 그런 선배가 되지 말아야지, 나는 의도적으로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단 한 명을 소외시키는 그런 치사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지 그런 다짐만이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