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아도 밟히지마. ep14]
기가 세고 말이 센 걸로, 또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사람이 있었다. 많은 스태프가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솔직하게 말해서 다들 무서워했다. 특히 그의 주특기는 다수 앞에서 면박을 주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 사람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일은 나약한 결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도 오래 버텼다며 격려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사람에게 나는 찍혔었다(?). 물론 유치하게 ‘내가 널 찍었다. 지켜볼 테니 조심해라!’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들은 적은 없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 시작엔 누군가의 이간질 아닌 이간질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는 날 참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평소 옷, 가방, 파우치 등 이런 아주 사적인 것에도 노골적으로 핀잔을 줬으며 내 앞에서 자신이 예뻐하는 대상의 명품 착장을 높이 세워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 짐을 바리바리 쇼핑팩에 쌓아 들고왔었는데..;;;; 그걸 창피하다고 하기도 했었다.ㅎㅎ)
어느 날은 좌식 식당에 앉아 함께 밥을 먹는데 평소 다리에 쥐가 잘 나는 내 눈치 없는 다리가 그때에도 강렬히 존재감을 뽐내며 다리에 쥐가 났다. 참다 참다 다리를 슬그머니 폈는데 지금 뭐 하는 거냐며 나의 예의 없는 태도(?)에 눈치를 줬다. 당시에 얼마나 불편하게 했는지 그보다 더 높은 상급자가 ‘사람을 왜 그리 불편하게 하냐며’ 눈총을 주기도 했다.
진행자로서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은 참 온화하고 밝았지만, 사실은 인이어를 통해 귀로 들어오는 곤욕스런 말들을 참아가며 버티고 있었다. 거친 한숨은 기본이고 ‘아니 왜 저러는 거야’ ‘아 진짜!!’ 그의 짜증은 내 귀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지만 나는 웃으며 방송할 수밖에 없는 고단한 생방송을 견뎠다.
하루는 방송을 무사히 마치고 인이어를 빼려는데 그가 소리를 꽥 질렀다.
“진행자한테 전해요!! 나한테 지금 당장 전화하라고!!!! 아 진짜!!! 뭐하는 거야!”
방송 사고도, 어떤 작은 실수도 전혀 없었던 날, 그는 많은 스태프 앞에서 나를 누르고 싶었는지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면 될 것을! 아니 자기가 직접 전화를 하면 될 것을! 모든 행동이 상식 밖으로 과하고 거칠었다. 모두들 내게 그냥 굽히고 들어가라고 어서 전화해보라고 했다. 전화를 안 하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초조함으로 그의 눈치를 보는, 그러면서 내 걱정을 해주는 그들이 안쓰러웠지만 난 사실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시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기에 전화를 걸긴 걸었다. 다 알면서도 전화를 했다. ‘그는 전화를 절대 받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원했던 건 나와의 통화가 아니라 나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었다. ‘지금 당장 전화하라고 악다구니를 썼으면서 전화를 받지 않는 그 심리는 뭘까?’ 전화를 받지 않는 그에게 백번 양보해서 문자도 남겼다. 역시 회신도, 전화도 없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에, 그가 화가 났다는 것에 온종일 절절매고 싶지 않았던 나는, 방송을 마치고 예정된 일을 하면서 저녁에 있는 대학원 수업까지 열심히 임했다. 그리고 아주 늦은 시각, 한창 대학원 수업에 집중하고 있던 그때 전화가 왔다. 담당 작가였다.
아직도 그분(?)에게 전화를 안 한 거냐며, 지금 난리가 났다고 했다. 하. 말리는 시누이 등장이다. 이분은 평소에도 말리는 시누이 역을 톡톡히 해내서 내게 많은 스트레스를 줬던 분인데 당시 전화 사건(?)에서도 그 역할을 열심히 수행했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연차가 많은 어른이라면 어떤 상황인지 아주 잘 알 텐데. 개인의 히스테릭한 감정을 공의로운 사건인 양 몰고 가다 못해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 그 분노를 끝내게 하려는 정신적 갑질의 상황. 그 시누이는 내게 전화를 걸어 내가 전화를 걸지 않아서 지금 일이 매우 커졌다고 왜 그랬냐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지금이라도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보라는 훈수와 함께.
그래. 정말 큰 일이 터졌나 들어나 보자. 내가 전화를 충실히, 받을 때까지 하지 않은 나의 잘못으로 인해 어떤 일들이 터졌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전화를 걸었고, 그는 전화를 받았다. 유치하게 받았다.
“아니, 너~~~~~~무 바쁘신가봐요.”
방송이 끝나자마자 왜 전화를 하라고 했는지 그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고 전화를 하라는 상사의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음에 역정을 내며, 결국은 “나는 당신과 같은 아나운서는 처음 봐요! 진짜 나랑 안 맞는다.”라는 말만 남긴 채 유선상 대화는 끝이 났다. 큰일이 터졌다던 작가의 말은 확인할 수 없었고, 그냥 그가 매우 화가 났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아나운서는 처음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 전화하라고 했는데 받을 때까지 안 했던 아나운서는 처음이었을까? 자신이 화가 났는데 비위를 맞춰주지 않는 아나운서는 내가 처음이었을까?
특성화고를 다니던 사촌 동생이 3학년 2학기가 되자 학교와 연계된 곳에 취업했다. 원했던 곳에 취업했다기보단 학교의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그냥 될만한 곳에 들어갔던 첫 직장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는 학교와 달라서 많이 힘들 거야. 그중엔 널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어. 나이가 많다고 연차가 있다고 함부로 할 수도 있고. 어느 정도는 있을 수 있는데... 만약에 너의 인격, 인권을 무시한다면 나는 네가 무작정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 학교 눈치 보면서 부모 눈치 보면서 부당한 대우를 그냥 참지만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제일이고 네가 우선이야. 너의 인격을 무시하게 그냥 두지 마.”
나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냥 견딘 일들이 무수히도 많지만 이제 갓 성인이 된 사회초년생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때 밟히면 정말이지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밟아도 밟히지 않길, 무엇보다 밟힐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