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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코치 Mar 11. 2024

영화팬들도 의외로 잘 모르는 영화의 기본 단위들

비트beat, 씬scene, 시퀀스sequence, 장act, 숏shot

영화의 기본 단위들은 크게 beat, scene, sequence, act 그리고 shot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중 scene과 shot은 구획이 눈에 보입니다. 끝과 끝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 단위들이라 하겠습니다. 


shot은 영화에서 가장 구체적인 단위입니다. 물리적으로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shot과 shot의 경계가 눈에 보입니다. 다만 편집 기술로 shot과 shot이 접합되는 지점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듭니다. 그래서 관람을 하는 동안에는 눈에 불을 켜고 보지 않는 이상 그 경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것처럼 인지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초심자라면 아직은 shot에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영화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려면 shot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텐데요. 초심자가 잘 숙지해두어야 할 개념은 shot보다는 scene입니다. 


scene은 shot처럼 경계선이 있는 건 아니지만 눈에 보이기는 합니다. 왜일까요? scene은 장소와 맞물려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장소가 바뀌면 씬이 바뀌는 것이므로 각각의 씬을 눈으로 구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scene은 사실상 유의미한 단위가 아닙니다. 시나리오가 여전히 scene 단위로 쓰이기는 해도 scene이 내용상의 분절 단위인 건 아닙니다.


scene과 shot은 형식적 분절들이지 내용상의 구획은 아닙니다. scene과 shot은 내용의 마디에 맞춰 끊어지는 단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용상의 실질적 구획은 scene과 shot이 아니라 beat, sequence, act입니다. 문제는 이 셋은 shot이나 scene처럼 분절점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따로 개념을 익히고 실제 영화에서 각각의 마디들을 짚어보지 않으면, 그런 경험이 없으면 분별해내기 어렵습니다.


영화의 플롯은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와 같은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작자들은 이렇게 작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듯이 영화를 만듭니다.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이것을 1분 단위로 나누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과 기초 개념을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원론적으로는 인상 비평입니다. 반면 내용상의 구획들을 잡아낼 수 있으면 객관적인 데이터에 근거해 영화를 구조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됩니다. 영화를 한결 더 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생충>의 피자박스 시퀀스를 예시로 보겠습니다.


피자박스 시퀀스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캐치하셨습니까? 대부분의 관객들은 기택이 진상이다, 피자집 사장이 싸가지가 없다 … 이런 정도의 일차적인 인상만을 갖습니다. 영화적 소양을 갖춘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기택 가족의 곤궁한 처지와 그에 대응하는 성격으로 생겨난 억척스러움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 어떤 분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반성적 통념에 근거해서 충숙과 젊은 피자집 사장이 다투는 모습에서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갑질을 하는 사태를 풍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할 것입니다.


반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내용상의 구획을 중심으로 공학적 분석을 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파악이 이루어집니다. 피자박스 시퀀스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택 가족의 피자박스 접기, 피자집 사장의 불량 박스 컨펌, 피자집 사장 회유하기. 그 과정에서 기우는 빵구난 알바 자리에 지원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만 해도 피자박스 시퀀스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이번에는 이 세 부분을 조금 더 조각내 볼까요. 첫 번째 부분인 기택 가족의 피자박스 접기는 달인 구간과 소독 연기 구간으로 나눌 수 있고, 세 번째 부분인 피자집 사장 회유하기는 충숙과 사장의 다툼 구간과 기우의 알바 대체자 지원 구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직은 여기서 무언갈 읽어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데이터를 확보해 놓으면 장면을 더 세밀하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씀드리면 공학적 분석의 효용이 그리 체감되지 않으실 테니, 공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장면 읽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는데요. 다음과 같은 분석이 가능하려면 공학적 분석의 개념들을 조금 더 학습해야 합니다. 감안하고 들어주십시오.


피자박스 시퀀스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은 기택입니다. 기택은 두 개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요. ①가두 소독이 이루어질 때 창문을 닫지 말라고 한다. ②달인을 따라하다가 피자 박스를 엉망으로 접는다. 기택은 자신이 창문을 닫지 말자고 했음에도 소독 연기가 집 안으로 들이쳐 가족들이 기침을 하고 힘들어 하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와중에 본인만 박스를 엉망으로 접습니다. 그리고 피자집 사장이 불량 박스에 문제를 제기하는데 장본인인 기택은 직접 나서서 문제를 수습하기는 커녕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러한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모습으로부터 기택의 극적 성격을 인지하게 됩니다. 즉 봉준호 감독과 한진원 작가는 이러한 인물 소개를 목적으로 이 장면을 설계한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기택이 저지른 문제를 가족들이 수습하는 상황으로부터 가족의 성격도 어느 정도 전달이 됩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고 할 때 대부분은 이런 식의 접근을 할 것입니다. 기택이 저지른 문제를 수습하는 건 충숙의 억척스러움과 기우, 기정의 능청스러움이다. 이때 가두 소독을 향한 기택 가족의 반응을 보면 가세가 기울어 반지하에 사는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면은 아버지인 기택이 앞뒤 재지 않고 자기가 꽂힌 데에서 일을 벌이다가 일이 잘못되면 어머니 충숙이 뒷감당을 하며 억척스러워지고, 아들, 딸 기우와 기정도 가정사를 수습하느라 자신들의 과업을 해쳐나가지 못하는 한국 가정사의 어떤 전형을 표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럴싸 하지요? 하지만 독해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장은 이런 식의 읽기를 권장하지 않겠습니다. 공학적 분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자박스 시퀀스에서의 두 개의 암시


이번에는 공학적 분석의 차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공학적 분석의 차원에서 볼 때 피자박스 시퀀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설정은 암시입니다. 영화의 플롯에서 중심 사건은 급격하게 펼쳐집니다. 거센 파도처럼 일어납니다. 따라서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자들에게는 이러한 사건이 관객들에게 뜬금 없어 보이거나 지나치게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게 하는 일이 요구됩니다. 이를 위해 가용할 수 있는 장치가 암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암시는 나중에 일어날 일과 유사한 상황을 사전에 눈에 띄지 않게 배치해 관객들이 그와 같은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설명만으로는 잘 와닿지 않으실 테니 지금 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기생충>을 보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피자박스 시퀀스에서는 특히 두 가지 암시가 눈에 띕니다. 하나는 다른 가족들이 집 밖에 나와 있을 때 반지하에 남아있는 기택입니다. 이건 제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무엇을 암시하는지 <기생충>을 보신 분들은 금방 알아차리실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피자집 사장을 기우, 기정, 충숙이 애워싸는 모습입니다. <기생충>의 중심 사건은 기택 가족의 위장 취업과 위장 취업을 들키지 않기입니다. 그리고 기택 가족의 위장 취업은 동익의 아내 연교를 속여먹음으로써 이루어지지요. 기택 가족 전원이 연교를 애워싸고 그에게 수작을 부리는 과정이 중점적으로 펼쳐집니다. 벌써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요. 기우, 기정, 충숙이 피자집 사장을 애워싸는 이 모습은 중심 사건에서 기택 가족이 연교를 애워싸는 것과 유사한 구도입니다.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자들이 작품을 설계하면서 특히 신경쓰고 공을 들이는 지점은 이런 것들입니다. 앞서 언급한 한국 가정사의 전형 같은 것은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지점이 아닙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대개 이런 지점들을 강조하지요. 제작자들과 평론가들 간의 간극이 있는 것입니다. 현직 일선에 있는 분들은 공감하실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오늘의 본론인 beat, sequence, act를 하나씩 정리해보겠습니다.


beat는  영화의 구성 단위 중 가장 작은 마디. 장면의 부분을 이루는 한 덩어리의 액션 구간입니다.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한 장면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 요소를 비트라고 한다. ... 비트는 행동/반응이라는 행위의 교환을 일컫는다. 비트가 변화를 가지고 반복되는 과정에서 장면이 구성된다."



이게 당장 찾아볼 수 있는 가장 간명한 정의입니다. 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지요. 그리고 불충분한 구석도 좀 있습니다. 피자박스 시퀀스를 예시로 비트 개념을 짚어보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피자박스 시퀀스를 세 부분으로 나눴습니다. 그중 첫째 부분인 기택 가족의 피자 박스 접기와 셋째 부분인 피자집 사장 회유하기는 각각 두 부분으로 더 나눴는데요. 이게 비트 단위로 나눈 것입니다. 영화의 장면에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가장 작은 마디가 비트인 것입니다. 초심자라면 영화를 볼 때 비트를 파악해 보려고 해보십시오. 조금씩 그 효용을 느끼실 것입니다. 비트에 비중을 많이 두는 제작자들은 이것을 대략 1분 단위로 맞추곤 합니다. 두 시간 영화라면 120개의 비트가 있는 셈입니다. 그럼 이 일정한 비트가 드라마에 리듬을 조성할 것입니다. 따라서 로버트 맥기의 정의에서 이 리듬의 측면을 덧붙이면 비트 개념에 관한 적절한 이해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sequence는 플롯 상 유의미한 시작과 끝을 갖는 하나의 사건event 단위를 말합니다. 여기서 사건 단위라는 말만 기억해두셔도 되겠습니다. 연극에 씬이 있다면 영화에는 시퀀스가 있는 격입니다. 


이미 <기생충>에서 살펴본 예시를 피자박스 ‘시퀀스’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피자박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한 덩어리로 묶을 수 있는데 영화에서는 그것을 시퀀스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피자박스 시퀀스를 세 부분으로 나눴는데요. 이것은 피자박스 시퀀스를 세 씬으로 나눈 것입니다. 앞서 제가 연극에는 씬이 있다면 영화에는 시퀀스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연극에서는 무대-장소-사건이 한 묶음입니다. 이 한 묶음이 씬을 이룹니다. 그런데 피자 박스 시퀀스는 일련의 사건이 집안, 현관, 집앞 이렇게 세 장소에서 펼쳐집니다. 즉 피자 박스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세 씬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세 씬이 한 시퀀스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자 박스 시퀀스는 동선이 짧아 연극 무대에서 재현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종종 한 무대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일련의 사건이 펼쳐지곤 합니다. 

따라서 연극에서 온 개념인 씬은 영화사 초창기를 지나면 형식적 구획으로만 쓰이게 됩니다. 시퀀스는 대체로 씬보다는 크고 장 또는 막이라고 번역되는 액트보다는 작습니다.


act는 장 또는 막이라고 번역됩니다. 플롯의 골격. 유형화된 전개 양상의 구획이라 하겠습니다.


아마 시나리오 관련 서적을 읽어본 분이라면 3장 구조라는 개념으로 act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3장 구조보다는 4장 구조가 쓰이는 추세인데 <기생충>도, 나무위키에서처럼 전형적인 3장 구조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3장보다는 4장 구조에 가깝습니다. 초심자라면 3장 구조를 충분히 숙지한 후에 4장 구조를 학습하는 걸 권하겠습니다. 3장 구조를 익혀두면 영화를 보면서 지금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3장 구조를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1장은 등장인물 소개 및 중심 갈등 형성, 2장은 중심 갈등의 고조, 3장은 문제 해결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기생충>의 피자박스 시퀀스는 1장에 해당합니다. 기택 가족의 처지를 보여줌으로써 등장인물 소개를 처리하는 장면입니다. <기생충>의 1장은 와이파이 시퀀스, 피자 박스 시퀀스, 과외 제안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와이파이 시퀀스에서는 기택 가족이 도둑 와이파이를 써야 할 정도로 곤궁한 처지에 있음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피자 박스 시퀀스는 기우가 빵구난 알바 자리에 지원하는 것으로 끝나고, 다음 시퀀스는 민혁이 기우에게 과외 아르바이트를 제안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럼으로써 중심 사건인 기택 가족의 위장 취업이 시작됩니다. <기생충>의 4장도 거칠게 이름 붙여 분류해 보자면 1장은 기택 가족의 처지, 2장은 기택 가족의 위장 취업, 3장은 위장 취업 들키지 않기: 문광 가족과 기택 가족의 대결 및 동익 가족 모르게 소동 수습하기, 4장은 유혈의 생일 파티 정도 되겠네요. 다들 기억하시겠지만 3장으로 넘어가면서 영화의 성격이 확 달라집니다. 4장 분류에 비춰보면 <기생충>이 전반부, 후반부가 극명하게 갈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조가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분열의 모티프와 이어집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공학적 분석에서 영화의 테마가 산출되는 과정을 가늠할 수 있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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