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arling Jan 15. 2019

플라멩코에 미쳤던 여자,,,,

플라멩코 첫번째 이야기

처음으로 제작했던 바따 데 꼴라 bata de cola로, 모델은 플라멩카인 Maria Tavora, Sevilla, Spain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던 시기가 있었다. 속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지 않고선 어쩌지 못할,,,, 드로잉을 하고, 일기를 쓰고,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도 해결되지 않던 깊고 깊은 아픔과 슬픔을, 속에서 아우성치지만 밖으로 끄짚어 내지 못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던 그때,,,,,영상 작업을 하면서 판토마임의 몸의 언어를 혼자 배우고, 몸의 언어가 주는 새로운 쾌감에 목마르던 그때,,,,그때 플라멩코를 만났었다. 파트너가 필요 없이 혼자서 독립적으로 있는. 카혼(네모난 나무 박스로 북과 같은 역학을 한다)이 주는 심장 박동과 같은 울림과 깐떼(노래부르는)부르는 한이 서린 꾸밈이 없는 메마른 목소리. 날카로우면서도 가슴에 박히는 단조의 기타 연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꾸며진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가 없는, 내면 안에서 부터 끄집어내는 한이 서린 몸짓.  대지의 어머니의 심장을 두드리듯, 중력을 더해 더욱더 깊이 나의 심장에 박혀지는 발 울림과 처절한 몸짓에 나는 반해 버렸다.


플라멩코 공연 준비, korea

이거였다. 내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것이,,,,,그렇게 해서 앞, 뒤 젤 것도 없이 시작한 플라멩코. 발 동작과 손동작이 따로 돌던 어설프던 시절이 지나가고, 절대 쉽지 않아서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단원의 한 명으로써, 댄서로써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5시간춤을 추기 위해 연습실에 짱 박혀서 혼자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결국은 몇 년을 준비해 오고 드디어 합격해서 있게 영국행 유학은 스페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바탕에는 나를 그만큼 믿어주시고 키워 주신 나의 플라멩코 스승인 이혜정 선생님. 아니, 선생님이기 이전에 아티스트이자, 배우이고, 인생의 선배이며 가족 같은 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분 덕분에 그분의 공연 의상들을 기초도 안 배운 상태에서 공연의 전체 비주얼을 기획, 디자인 제작을 손수 맡아서 수가 있었다. 그로 인해 플라멩코의 고장인 스페인, 세비야로 가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María Pagés Compañía의 수석 기타리스트인 Fyty Carillo, Sevilla , Spain

그냥 거리를 걸어 다니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들리는 플라멩코의 선율은 나를 전율하게 하였고, 이방인으로써 알기엔 너무 어려운, 겉으로 보기엔 너무도 친절하지만 결국은 깊이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플라멩코의 진면목을 알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플라멩코 기타리스트이자 아티스트인 Fyty를 알게 된 것은 나의 인생의 커다란 선물이었다. 그로 인해 진정한 플라멩코의 깊고 깊은 심장부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플라멩코가 주는 마법의 시간을 만끽할 수가 있었다. 이런 magic time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연주하는 커다란 공연장이나 작은 tablao(작은 바에서 열리는 공연)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세비야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Feria에서 친구들과 한밤중까지 이어지는 노래와 춤, Sevilla, Spain

이는 새벽녘까지 이뤄지는 친구들끼리의 와인이나 맥주가 한잔 한잔 들어가면서 조금씩 깊어지는 밤과 함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인프레 비소처럼 다가왔다가 가버린다. Fyty 덕에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유명인사들과도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고, 플라멩코로 인생을 거는 여러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중에는 인생의 친구로 남게 된 이들도 있었다.


첫 플라멩카 페르시아나 Persiana가 제작되는 중 Fyty와 함께. Sevilla, Spain

특히,  Fyty와 함께 시작한  플라멩카 페르시아나 Persiana(뜨거운 태양을 가리는 "발")는 플라멩코 의상 디자이너로서만 의 국한된 내가 아닌, 다시 플라멩코를 가지고 나만의 고유하고 다양한 방식의 아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나를 확장시켜주는 커다란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처음 플라멩카 페르시아나 Persiana는 Fyty 집에 걸린 낡은 페르시아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비야에서는 옥상 azotea를 여러 용도로 많이 사용하곤 하는데, (빨래 말리기, 친구들과의 식사나 파티, 일광욕하면서 독서하기 등등,,,,) 나 또한 2m x 2.8m 길이의 거대한 페르시아나 Persiana를 옥상 azotea에 펼쳐놓고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기 전부터 너무 뜨거워지기 전까지 작업하곤 했었다. 그의 모든 서포트(장소, 재료, 시간, 심지어 식사까지 챙겨다 주었다.) 속에서 처음으로  플라멩카 페르시아나 Persiana를 발콘에 걸었을 때, 우린 사진작가 Adam과 플라멩코 까호니스트(까혼 치는 사람)인 Andreji과 함께 축하 연주 및 자축 파티를 했다.

Fyty와 함께 시작한  플라멩카 페르시아나 Persiana를 집시들의 정착지였던 Triana의 한 거리에 전시하기 시작. Sevilla, Spain

플라멩카 페르시아나 Persiana가 하나씩 완성되어 걸리기 시작하면서, 세비야의 뜨리아나Triana의  이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되었다,  이 중에서 3점이 플라멩코 박물관 Museo del Flamenco, Cristina Hoyos, Sevilla의 얼굴 마담이라고 할 수 있는 대형 쇼윈도 전체 3면에 3년 동안 전시되다가, 이후 2점 은 영구 소장되었다. 나머지 한 점은 독일의 한 개인 컬랙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이 전시 효과들로 인해, 어느 한 개인 컬랙터의 제작 주문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플라멩코와 스페인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인장과의 결합으로 맺여진 드로잉들을 제작, 전시, 판매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Chica(Francesca)의 공연을 위한 의상들 제작, 공연 ¨La Isla¨ Malta Arts Festival, Marta
Chica(Francesca)의 공연을 위한 의상들 제작, 공연 ¨La Isla¨ Malta Arts Festival, Marta

세비야의 뜨거운 태양처럼 뜨겁고 눈부시던 순간순간이었다. 물론 이런 순간이 오기 이전에 하루에 먹을 시간도 없어 길을 가면서 보까디요(샌드위치)먹으며 4시간의 스페인어 수업, 4시간의 다자인 수업(결국 스페인어로 디자인에 필요한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플라멩코 댄스를 위한 의상이 아닌, 4월에 있는 세비야인들을 위한 축제 Feria를 위한 의상 밖에 배울 수가 없었다.) 2시간의 플라멩코 수업을 하며 하루하루를 꿈 같이 보냈었다. 그러면서 플라멩코 댄서를 위한 의상 디자이너들을 찾아다니며 나의 포트폴리오들을 보여주고 배울 기회를 찾았으나, 결국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독학 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칭찬을 하지만 정작 가르쳐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플라멩코 프로 댄서들의 조언들, 춤을 이해해야지만 만들 있는 작고 미묘한 차이들을 춤을 배워가며 만들고 선보이고 만들고 고치면서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고 이를 알아주는 댄서들이 시간과 함께 조금씩 쌓여 갔었다. 그렇게 시간이 쌓임과 함께 나의 의상들도 세비야를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프로들의 손에 얹어져서 세계로 보내졌다. 한국은 물론, 스페인, 멕시코, 칠레, 미국, 이탈리아, 일본, 말타, 호주, 러시아,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등,,,,나의 의상들은 플라멩카들의 손에 건네져 여행을 시작했다.

Sonia(왼쪽), Maria Tavora(중간), Tracy(오른쪽), Sevilla, Spain


플라멩코 친구들과 함께하는 낮술, Triana, Sevilla, Spain


세비야의 뜨거운 태양과 플라멩코는 처음 땅을 밟았을 때의 긴장과 한국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오던, 작업노트를 쓰고, 사진과 영상을 찍어 대며 모든 흔적을 남겨야지만 된다던 나의 병적인 습관들을 조금씩 녹여갔다. 긴장감도 풀어지고, 깊은 밤까지 플라멩코에 취하고 새벽의 쌀쌀한 공기를 가르며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여름엔 가끔 스페인 남부 바닷가에 가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태양을 만끽하며 드러누워 있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내 인생의 동반자 Giorgio와 처음으로 맞이하던 크리스마스이브. 우리는 세비야의 모든 전경이 다 보이는 Encarnacion에 올라가 aperitivo를 했다. Sevilla

그러던 어느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선물이자 행운인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면서 나의 인생은 다른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우리가 싱글일 때까지는 세비야에서의 삶은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치 눈부시기만 했었다. 나의 인생의 동반자 Giorgio는 이탈리안이자 세비야의 이탈리안 레스토랑들의 주인이자 요리사였다. 레스토랑을 운영하기에 플라멩코계 사람들이 아닌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친구들을 초대하게 되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집에 와서 어울리게 되었다.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안들의 음식에 대한 사랑은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게다가 요리사인 만큼 쉬는 날이면 항상 친구들을 초대해서 한국 음식과 이탈리안 음식, 퓨전 음식들을 준비해서 좋은 와인, 치즈와 함께 밤을 보내곤 했었다.

첫 아들인 율 Yul 이가 태어난지 1달 채 안되었을때, Sevilla, Spain

그러던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 내 인생에 사랑이란 정말 운이 없는 맹목적 이거나 어긋나기만 하는 것이었고, 내 인생의 큰 그림에 결혼이나 아이는 계획에 전혀 없이 30년을 넘게 살아왔었다. 그런 내가 이 사람을 만나서 " 이 사람과 함께라면 괜찮겠다" 라고 변해갔고,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배 속에 아이가 생기면서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도시인 세비야가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진정 내 아이의 미래를 여기서 보내고 싶은 것인지,,,,모성의 힘은 한 개인의 열정을 압도할 수 있다는 걸 살면서 깨우치게 되었다. 그렇게도 사랑하던 이 도시지만, 나의 아이와 함께하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게도 즐기던 낮 술과 어디서든 마주치던 친구들, 작열하는 태양, 플라멩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등지고 우리는 이탈리아의 밀라노 근교로 떠났다. 물론, 이탈리아의 밀라노 근교로 가게 이유는 아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아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어디로 떠날지 여러 곳들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1년 정도 이후에 떠날 예정이었다.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남편과 동업자들 간의 피할 없었던 갈등은 근 20-40년간의 우정과 동업을 모두 산산조각 내었고, 치를 떨며 세비야의 레스토랑들의 모든 지분을 정리하고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었다. 이로써, 남편의 가족들이 있는 이탈리아로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아이를 가지면서 남편과 나는 우리 아이와 함께 할 커다란 그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아이에게 어떤 미래를 안겨주고 싶은 것인지, 어떤 환경 속에서 같이 살아가고 싶은 것인지,,,,,쉴 새 없이 얘기하고 생각하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둘째 딸인 Gaia, Armacao di Pera, Algarve, Portugal

간단히 먼저 말하자면, 1년에 6개월만 일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시간을 버는, 함께 시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질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만약 남편이 예전처럼 1년 내내 일했다면 물론 1년에 1-2 달의 휴가는 있겠지만, 하루하루 보내는 시간으로 치면,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었다. 낮에 일하고 집에서 잠깐 쉬었다가 또 저녁 타임 일하러 가야 하고, 모든 공휴일들은 빠짐없이 일해야 했을 테니까. 그렇게 아이를 안 볼 거라면 나을 생각도 안 했다며, 아이와 어떻게 하면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를 두고 우리는 함께 고민을 했었다.


남편의 3번째 레스토랑이 위치한 Zambujera do Mar, Alentejo, Portugal

남편은 세비야 이외에 스페인 남부의 cadiz와 conil 사이의 바닷가에 위치한 Zahara de los atunes라는 부촌의 바닷가에 동업자들과 함께 운영하는 여름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었다. 일 년에 3-4개월 열고 문을 닫는 여름휴가 시즌을 위한 레스토랑인 것이다. 그렇게 짧게 일하는 것에 비하면, 이미 10여 년이 넘었기 때문에 10년 넘는 가족 단골손님들이 많았고, 수입도 꽤 괜찮았다. 여기에서 모티브를 찾고, 우리는 평소에 즐겨가던 포르투갈에 예전에 밑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와 새로운 바닷가 레스토랑들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살아 간지 5년째.

남편의 스페인 바닷가 레스토랑 정원, Zahara de los Atunes, Cadiz, Spain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전에 남편이 1년 내내 일했을 때보다 오히려 6개월 일하고 있는 지금의 수입이 더 많고, 돈을 벌기보다 시간을 버는 삶의 방식은 지출을 줄어들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기에 쓸데없는 곳에 돈을 많이 들이곤 한다. 또한 허한 마음이나 스트레스에 여러 가지 지출을 만들어 낸다. 더욱이, 지금의 소비사회에서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카드 결제들을 해버리곤 한다. 바닷가에 위치한 레스토랑 이기에 바닷가에서 지내게 되면서, 대 자연이 주는 힘을 받고, 순간순간을 즐기며 느림의 미를 배워간다.

남편의 옛 동업자들이자 친구들인 Luca와 Rita가 남편을 찾아 와준 가을의 어느날, Lagos, Algarve, Portugal

이렇게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던 여자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믿어지지 않을 만치 행복하고 눈부시기만 하던 나의 인생에 또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을 찍는 사건이 있었다. 첫째 아이가 3살 반, 둘째 아이가 겨우 4개월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한창 남편의 일이 바빠지기 시작하던 7월의 여름, 남편의 스페인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과 바다에 가기 위해 가방을 챙기다 가져가야 할 물건이 있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가, 사다리가 열리는 바람에 사다리에서 발을 못 떼어서 그만 사다리와 함께 쓰러지고, 나의 왼쪽 다리는 완전히 돌아가 버렸다. 부랴부랴 1시간이 걸려 도착한 병원에선 바로 엑스레이를 찍은 뒤, 돌아간 뼈부터 마취제도 안 놓고 확 돌려놓고 마취제를 놓아주었다. 그때만큼 공포스러운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4시간에 걸친 수술을 마치고, 한 달 동안 화장실 가는 것 이외에는 침대에 누워서 발이 심장보다 더 높이 올려져 있어야 했고, 가족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나와준 친구와 아이 둘과 함께 1달 뒤 이탈리아로 먼저 돌아왔다. 남편은 이미 한 달 동안 레스토랑에서도 집에서도 24시간 일 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었는데도, 우리가 떠난 지 1주일 후 결국은 가장 바쁜 시기인 8월에 자신을 대신할 이들을 구해 놓고, 기어이 일을 그만두고 나의 곁으로 와 주었다. 돈을 벌기보다, 가족을 위해 모두 제쳐 놓고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다시금 발을 땅에 놓을 수 있게 된 건 수술 후 6개월 뒤, 절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된 건 1년 뒤,,,,아직도 2년이 더 지났지만 완벽하게 나았다고 할 수는 없다.



신기한 건, 사고가 난 뒤로 매일같이 플라멩코를 추는 꿈을 꾸었었다. 이탈리아에 가서 다시 찾아본 플라멩코는 내가 아는 플라멩코와는 좀 달랐다. 세비야에서 세계 방방 곳곳을 무대로 다니는 선생님들에게 매일 같이 춤을 배우다가, 스페인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다시 플라멩코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어디에서도 출 수 없게 된 플라멩코,,,,그렇게 거의 3년이 지났는데,,,,사고 이후, 아직도 프로로 플라멩코를 계속 추는 꿈을 거의 매일같이 꿨었다. 아마도 다시는 플라멩코 춤을 출 수 없을 거라는 막연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사고로 인해 취소되었던 한국 행은 1년 뒤로 미루어졌다. 1년 뒤 한국에서 다시 만난 나의 첫 스승님인 이혜정 선생님. 선생님과 와인을 기울이며 지난 있었던 힘겨운 1년을 토로하던 중, 선생님이 전해 주신 이야기는 나에게 거의 충격적이었다. 나도 익히 알고 지내던 선생님의 제자 분이시던 Siega님은 나의 어머님 뻘 되시는 분이시다. 이 분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차 사고가 나셔서 양쪽 발목이 다 부러지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활동적이시던 분이 6개월을 꼼짝도 못 하시다가 나가시는 첫 외출은 해외 출장, 그러고서 다시 돌아오셔서 플라멩코를 다시 추시는데, 모든 이들이 두 눈을 뜨고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연차 물었었다고 한다. 괜찮으시냐고,,, 거기에 말씀해 주시는 게, “ 당연히 아프죠,,,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춰야겠는데,,,,,” 이 말씀이 내 머릿속의 나를 묶고 있던 어떤 사슬을 끊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한 번은 도전해 봐야겠다고, 그렇게 해서 그다음 날 선생님의 수업에 두 아이는 뒤에 앉혀 두고 1시간을 미친 듯이 한 풀듯이 추었다. (물론 맨발로) 꼭 어제 추었던 것 마냥, 플라멩코를 나는 머리로 가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날 돌아와서 발이 많이도 아팠지만, 그래도 이제는 다시는 못 출 것이라는 공포는 사라 졌다.


첫째  아들이  만 3살  반  무렵,  나의  플라멩코  아티스트  친구들인  기타리스트  Fyty와  카호니스트  Andrei의  공연 영상을  보며 기타  연주하는  장면,

그리고 또 2년이 좀 넘은 오늘, 나의 둘째 딸은 정말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난 마냥 음악만 들으면 몸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 나의 둘째 딸에게 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플라멩코를 조금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먼저는 사진으로, 영상으로, 엄마가 추는 모습들과 엄마가 만들어준 의상들을 입고 공연장에서 춤추는 플라멩카들을 보여주면서,,,,,우리는 이렇게 다시 시작한다.

둘째 딸인 가이아 Gaia가 나의 스카프를 플라멩코 망토처럼 가지고 논다. Armacao de Pera, Algarve, Portuga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