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6개월 동안 소식이 한참 뜸해서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셋째 아이를 낳고 많이 바빠서 그런지 한참 궁금해하시는 여러 지인들의 질문에 어렵게 입을 열어본다. 이번 글을 올리는데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고, 망설이는 부분들도 많았지만, 용기 내여 진솔하게 글로 내려놓으려고 한다.
1년 반이란 시간이 지나가고도 아직도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이로 인해 나라들마다 각기 여러 정책들과 대책들을 내세워보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늠하기가 여간 힘들다.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먼 미래를 계획하기란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현재, 가장 가까운 미래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새로 세상에 나온 셋째 아이 이안이를 맞이하며 우리가 직접 지을 "나무집 프로젝트"를 구상하였다. 이미 땅 주인인 David가 에코 마을 Eco village 프로젝트를 정부에 신청하고 기다리는 중이지만, 우리의 프로젝트는 이미 시동이 걸렸다. 혹시라도 거절될 경우, 언제든 집을 분리해서 정리할 수 있도록 집의 초석을 나무 기둥들을 박아서 만들기로 했다.
처음으로 설계한 베이스. 이후로 여러가지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특별한 그림
남편 지오르지오와 함께 집을 설계하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면적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Lombardia 지방의 땅 값이 많이 내려서 몇 달을 집 사이트들을 뒤적이면서 보내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만 해도 우리 4 가족을 위해서 정원이 있고 최소 80m2 이상인 집만을 골라보곤 했었었더랬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우리 5 가족을 위해서 발콘 10m 2에다가 집 면적 36m 2이면 충분했다. 근 1년을 18m 2인 카라반에서 지낸 우리로써는 이미 2배가 될 집이 엄청나게 커다랬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은 드넓은 언덕과 나무들 사이사이를 휘져어가며 지내기에, 그렇게 커다란 집이 실제로 필요치 않았다.
위치를 정하고 수치를 제기 시작했다.
우리가 정한 미래의 나무집은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오렌지 나무들이 앞에 무수히 있고, 옆으로는 무화과나무와 아몬드 나무들이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이고, 뒤로는 작은 언덕을 따라 무수한 나무들이 자신의 푸른 잎을 뽐내며 여러 새들의 보금자리들을 만들어 주고,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하수가 40년 넘게 마르지 않고 졸졸졸 흐르는, 이른바 명당이었다. 적당히 다른 가족들과 동떨어져 있어서 이안이가 낮잠 자는 데 있어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을 수 있는 살짝 외딴곳이었다.
셋째인 이안이를 낳은지 열흘쯤 되니까 생활 리듬이 다시 궤도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면 너무 에너지가 넘치는 걸까? 드디어 우리의 나무집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지오르지오와 나는 미리 봐 둔 곳에 가서 집을 짓기 위한 실질적인 면적을 제고, 위치를 정했다. 사람의 손길을 받지 않아 무성하게 난 잡초들과 죽은 오렌지 나무 2그루를 잘라 공간을 만들고, 경사가 진 바닥을평평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무 기둥들을 1m 간격으로 박았다. 36개의 기둥들을 박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Marvel의 토르 Thor의 망치가 있었으면 그냥 단번에 밖았을텐데,,,,하는 안쓰런 마음이 들었었다.
토르 Thor의 망치가 필요한 나의 남편 지오로지오 Giorgio
더욱이, 모든 목자재들을 이 높은 언덕까지 옮겨오는 데에는 이번 겨울 유난히도 많이 내린 비 때문에 질퍽해진 땅으로 인해 자동차로 다 옮기지 못해서 직접 수레에 싣고 가서 마지막 10미터는 어깨에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무 안쓰러워서 옆에서 이안이를 아기띠에 둘러메고 힘을 써보곤 하지만, 턱도 없었다. 기특하게도 율이와 가이아도 힘들게 일하는 아빠를 도와서 나무 기둥들을 힘을 합쳐서 옮기고, 기름칠도 하는 작은 일꾼들이 되어주었다. 또한, 힘들게 일하고 온 엄마 아빠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마사지해주는 가이아가 있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남편이 뚝딱뚝딱 짓는 것이, 마치 직업이 집 짓는 사람이나, 목수가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면에, 남편은 평생 집 한번 지어본 적 없는 25년을 레스토랑 부엌에서 요리하는 이탈리안 셰프이다. 나 또한, 대학시절과 졸업 후 한동안 영화의 세트팀에서 막내로 일한 경험밖에 없는 미대나온 여자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겁 없는 나무집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평평한 바닥을 만들기 위한 베이스 기둥들이 완성되고, 바닥을 깔았다.
모든 베이스 기둥들을 박고, 기반을 만든 다음, 나무가 썩지 않게 기름칠을 하고, 드디어 바닥을 깔기 시작했다. 바닥을 깔자 또 어김없이 비가 쏟아진다. 날씨만 도와줬다면 1달도 안 걸려서 만들어질 집이, 질척 질척 내리는 겨울비로 근 2달이 걸렸다. 남편은 이른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집을 짓고, 밤에 돌아와서는 아기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는 동안, 모든 생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과 공부, 아이들 프로젝트를 맞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이미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었다. 얼른 끝내는 수밖에! 차츰차츰 집의 뼈대들이 만들어지고, 벽을 이어 붙이고, 창문들과 문틀을 연결했다. 다음 주 일기 예보에서 또 비가 온다고 하자, 우리는 지붕을 얹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였다. 지붕의 기둥 뼈들을 연결하고 2.5미터 위에 아슬아슬하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남편을 사다리 밑에서 받쳐주며 조마조마했었더랬지!
드디어 뼈대들이 완성되고 벽과 지붕을 붙여가기 시작했다.
지붕위에 겁없이 올라가 있는 나의 남편 지오르지오Giorgio
딱 하루만, 딱 하루만 더 있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비가 세지 않게 잘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비가 와 진흙투성이에 발이 푹푹 들어가고 미끌거리는 땅을 장화를 신고 오르락내리락하며 비가 세는 부분에 물을 담을 대야들을 놓았다. 그나마 바닥에 비닐을 깔아 두었으니 망정이지,,,,비가 그치고 해가 뜰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기를 며칠, 해가 쨍쨍하게 비치자, 비가 세는 부분을 보수하며 집을 완성해갔다. 이렇게 글로 옮기니 쉬워 보이지, 말처럼 쉽지 않은, 아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꽤나 피곤하고 힘든 시간들이었었다. 막판에 그렇게도 많이 논쟁을 벌였던 것을 보면... 지난 10년간 우리가 이렇게 많이 언성을 높인 적이 있었던가? 어떨 때에는 내가 옳았어도 이미 피곤에 지친 남편은 내 말을 듣지 않았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이 틀린걸 나중에야 인정하곤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 집을 직접 내 손으로 지어간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린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거나, 나뭇가지들로 인디언집들을 만들듯, 기적 같은, 경이적인 순간들이었다. 내가 살 터전을 내 손으로 지어간다는 것, 농사를 짓듯, 내 삶을 내가 개척해나간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이제는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현대 기술의 발달로 인해 너무도 편안해진 삶이 우리를 못 하나도 박을 줄 모르는 무능력한 인간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디지털화되고 자동화된 현대 삶 속에서, 우리는 손으로 할 수 있는 작업들이 주는 중요성이 상실되고, 이 부재로 인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것들을 잃어가고 있다.
남편이 계획한 이 나무집의 가장 큰 컨셉은, 모든 자재들이 가볍고, 실용적이고, 간단하며, 경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생 단 한 번도 집을 지어본 적 없는 남편이기에, 혹시라도 무게들 때문에 집이 기운다던가, 비가 센다던가 하면 어쩌지! 하는 근심이 많았었다. 나무집의 가장 중요한 규칙인 가벼움은 우리가 가져다 놓는 물건에도 해당이 되었다. 이 나무집에서 우리가 새로 산 것이라곤, 아이들을 위한 매트리스와 가스용 냉장고와 2개짜리 부엌용 작은 가스불이 다였다. 발콘에 놓을 테이블과 의자들은 레스토랑에서 챙겨 왔고, 거실에 놓을 소파 겸용인 1인용 가벼운 매트리스는 친구가 가져다주었다. 아이들과 우리 방에 들어갈 옷장과 음식 재료들을 넣을 서랍장은 남은 나무 자재들로 직접 만들었다. 집시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엄청난 짐들을 정리했듯이, 언덕 위의 나무집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들은 다른 짐들을 늘리지 않기로 노력했다.
율이와 가이아가 함께 쓸 방. (비밀 창고처럼 방 밑으로 이어지는 아이들 아지트와 열결되는 비밀 문을 만들 예정이다.)
남편과 나와 이안이가 함께 쓸 방
아직도 처음으로 우리가 직접 지은 이 나무집에서 보낸 첫날밤을 기억한다. 그다음 날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최대한 필요한 물건들을 자동차에 싣고 옮기기를 몇 번.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넓은 이 공간에서 아이들은 테이블 게임들과 책들을 여기저기 넓게 넓게 펼쳐가며(집시의 집에서는 하기 힘들었을) 조용히 읽으며 놀았고, 피곤에 지친 남편과 나는 노곤한 몸을 벽에 기대고 반쯤 감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온한 정적이 맴돌고, 우리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지은 나무집에서의 첫날 밤.
나무집에 입주하고서도 몇 차례나 비가 내렸는지 모른다. (남부 포르투갈에서 비라니! 이렇게 많은 비는 포르투갈에 와서 처음 본다.) 비가 내릴 때마다 남편과 나는 혹시라도 비가 세는 부분은 없는지 집안 이곳저곳을 살핀다. 포르투갈 특유의 강한 바람들이 불어올 때면 혹시라도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의 집 마냥 휙~날아갈까 봐 약간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나무집은 고쳐지고 다져지며 우리의 필요에 맞추어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내부의 벽도 점차 만들어지고, 발콘도 만들어지고, 밑에 창고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아지트 공간이 만들어지고, 외부 샤워실이 만들어지고, 뒷마당을 평평하게 만들어 팔렛을 깔아 커뮤니티 식구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눌 수도 있고, 춤추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둘째 딸 가이아와 춤을 출 수도 있는 공간도 만들어지고, 그 뒤켠에는 작은 텃밭을 만들어 호박, 콩, 고추, 오이, 바질리코, 토마토, 멜론 등을 심었다.
넓어진 거실 공간을 이용해서 아이들과 함께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식구들과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생각을 나눈다.
뒷마당에 작은 텃밭을 만들어 우리 손으로 직접 일구어낸 야채로 밥을 짓는 기쁨을 만끽해본다.
남편 지오르지오와 나는 아이가 하나씩 태어날 때마다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지고 왔었다. 첫째 아이 율이를 임신했을 때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세비야의 생활을 등지고 일 년에 6개월만 일하고 이곳저곳에서 살아가는 노마딕 삶을 시작해 나갔다. 둘째 아이 가이아가 태어나서는 스페인 바닷가에 남아있던 마지막 레스토랑을 팔고 모든 에너지를 포르투갈 레스토랑 쪽으로 돌렸었다. 그럼으로써, 포르투갈에서 반년, 이탈리아에서 반년씩 살아갔었다. 이번 셋째 아이인 이안이는 포르투갈 바닷가의 집을 정리하고 다른 가족들과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서 집시의 집(카라반)에서 맞이한 아이였다. 이제는 새롭게 태어난 셋째 아이 이안이와 우리 집시 가족은 우리가 직접 지은 나무집으로 옮겼다. 무엇이 우리를 다시 집시의 집에서 나무집으로 옮기도록 했는지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1년 전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커다란 집이나 좋은 집이 아닌, 어른들과 아이들이 어떠한 제한이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삶을 나눌 수 있는 휴머니즘을 찾아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집이든, 카라반이든, 캠핑카든, 어디에서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함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1년을 함께 보내고서 이제는 이 커뮤니티 속에서 삶을 뿌리내리기 위해서 조금 더 커다란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집에서도 아이들과 여러 프로젝트들을 구성할 수도 있고,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공간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 개인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안이가 비록 저녁에 잠이 들어도 방과 거실 공간이 구분 지어지면서 큰 아이들은 여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에서 지금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실천해 가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현재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처럼!
발콘을 통해서 들어오는 저녁 노을빛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안이와 함께 추는 Bl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