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세 번째 이야기
나의 첫째 아들은 정말 사람들을 잘 따르고 좋아하는 꼬마 아이다. 지금도 밖에서 낯선 누군가를 만나면 나보다도 먼저 얘기들을 꺼내는 수다쟁이 꼬마다. 그럼으로써 조금은 낯선 이에게 먼저 말 걸기 힘들어하는 서울깍쟁이인 나와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멋진 다리를 만들어 주는 매개체가 되어 주기도 한다. 만 2살 때에도 엄마 아빠 없이도 나의 이탈리안 요리사 남편의 동료들의 손을 잡고 너무도 쉽게 바닷가에서 1시간씩 놀고 오곤 했다. 또한 아빠를 워낙 잘 따르는지라, 모유 수유를 하는 중에도 만 8개월 되었을 때 아이를 재워 두고 밤에 친구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기 위해 밤 외출을 시도해 보기도 했었다. 다녀와서도 아빠 품에 안겨서 새근새근 잘 자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안심이 되기도 하고 조금 허전하기도 했었다.
아이가 만 1살 하고 9개월 되었을 쯤이었다. 스페인에 살고 있는 가장 친한 친구 커플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럼으로써 나는 정말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이탈리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친구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세비야로 향했다. 아이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먹고, 놀고, 산책하고, 일하고, 화장실 가고, 잠을 자는 것까지 언제나 24시간 함께 해왔던 나로선, 너무도 이상하고 허전도 하고, 무언가 놓고 온 듯한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남편이나 아이 없이 나 혼자서 여행한 지가 너무도 오래되어서 약간의 긴장감과 두려움도 존재했으나, 온전히 나 혼자만을 위한 여행을 할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도착한 첫날, 플라멩코 일 관계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 집에서 우리는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저녁 무렵 걱정스럽게 남편에게 전화했었더니, 나 없이 너무도 평안히 잘 지내고, 엄마 없이 잘도 잠이든 나의 첫째 아들에 한시름 놓고, 이제 내일부터 단단히 파티에서 놀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다음 날 아침, 친구의 결혼식과 피로연 파티가 이어졌다. 신부인 내 친구 Nicte는 멕시코인이며 신랑인 내 친구 Joshua는 미국인이었다. 그러므로 이미 양쪽 부모님들과 가족들이 머나먼 멕시코와 미국 그리고 독일 (신부의 여동생은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다.)에서 이들의 결혼을 축하하러 자리를 함께 했었다. 또한, 벨기에에서, 미국에서, 이탈리아 등등에서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친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었다. 파티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악과 춤과 맛난 음식과 술 일 것이다!
우리들의 친구인 Meriem이 디제잉을 맡았었는데, 그녀는 뮤지션들의 매니지먼트와 페스티벌 등을 준비하는 일을 하는데, 지금 현재는 벨기에에서 현대 무용 아티스트인 Sidi Larbi Cherkaoui 컴페니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모로코 국제 기자 출신인 아버지와 체코 출신의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프랑스 국제 학교를 나와 모국어만 아랍어, 체코어, 프랑스어, 영어 4개 국어를 구사하고, 이외에 스페인어를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구사한다. 그녀의 뛰어난 기억력과 음악에 대한 사랑은 60년도 음악부터 현재 음악까지 주르륵 다 뀌고 있기에 그녀의 디제잉은 우리로 하여금 춤을 안 출래야 안 출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게 얼마 만에 내 몸을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인가! 첫째 아들을 낳고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는 하루에 한 시간씩 Ramón Martínez의 Fin de Bulerias 플라멩코 수업을 들었으나, 이탈리아에선 세비야에서 내가 받아오던 수준의 수업은 기대할 수가 없었다. 거진 일 년을 춤은 커녕, 언제나 아기띠와 함께 나의 첫째 아들 율과 한 몸으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이렇게 혼자서 떠난 여행은 엄마이기 이전의 나라는 사람을 알아오던 친구들과의 가슴 벅찬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춤. 평소에 쉽게 춤을 추지 않는 나의 멋쟁이 친구 Andreji와 함께 춤을 추게 되었다. 발 동작을 보려고 밑을 보지 말라는 그의 조언대로, 그가 리드하는 대로, 음악이 느껴지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가슴속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게 쏟아올라 나의 두 볼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Andreji는 모두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나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정말 한참을 울고 나니 뭔가 가슴속의 웅얼이졌던 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많이도 눈물이 났었는지,,,,,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의 엄마로써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로써가 아닌, 나를 한 예술가로 알고 지내던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나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가지기 이전의 나와 엄마가 된 현재의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었던 거 같다. 이전에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항상 자신에게 물어보고, 이를 실천해가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면, 엄마가 된 이후에는 나를 돌보기 이전에 내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를 필요로 하는 나의 이 조그만 아이를 위해 어떻게 해줘야 할지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살아갔다. 그러다 보니, 나의 세상의 중심이던 내가 한쪽으로 치워져서 오랜 시간 동안 들여다보지 않아 고개 숙이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 같다.
모성애가 가진 이 어마어마한 힘은 플라멩코에 대한 나의 열정을 서서히 식혀갔다. 아이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의 시간들이 너무도 귀하고 좋았었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모든 시간들이 정지되는 느낌이다. 그냥 현재만이 존재한다. 그렇게 현재와 현재가 이어져서 시간은 흐르고,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나와 남편과 아이가 존재했다. 물론, 아이를 낳고도 2년 반 동안은 나의 분신처럼 아이를 아기띠에 메고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비행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해 갔다. 커다란 프로젝트가 들어올 때에는 남편이 일하는 여름 기간 이어도 아침시간에는 아이를 데리고 바깥으로 놀러 나가 주곤 했고, 아이가 잠들은 저녁시간부터 밤새도록 일을 하고 새벽 6시나 7시가 되어서야 잠을 청하곤 했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면서도 서서히 식어가는 나의 심장을 느끼고,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세비야에 가도 어떨 때에는 공연 한번 못 보고 (물론 아이가 잠이 드는 밤에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일만 처리하고 돌아오는 일이 몇 번씩 반복이 되면서 마지막 카우트 다운을 정했다. 그렇게 해서 비엔날레 플라멩코를 기점으로 모든 걸 정리했다. 물론 이후에 플라멩코 의상 이외에 커다란 플라멩카 페르시아나 작품들이 플라멩코 박물관이나 개인 소장으로 팔리는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플라멩코 의상을 디자인하거나 제작하는 일은 완전히 그만두었다. 그때부터가 진정한 나와의 대화의 시작이었던 거 같다.
언제나 나의 꿈이 확실하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며 살아오던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난극에 부딪혔다.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는 붕 뜬 시간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하고 싶은 커다란 그림은 왠간히 그려지고 있었지만, 이 안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충족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미친 듯이 책을 잡고 읽기 시작하고 아이를 낳고 좀 뜸했던 일기를 다시 쓰면서 나와의 일대일 대화가 시작되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이탈리안 요리사 남편과 대화하다가 정말 중요한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 준다고 많이들 착각하는 것 같아. 직업이란 건, 단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중에 하나일 뿐인데 말이야.”
그렇다! 나 또한 이 함정에 빠져서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는지가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얘기해 주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내가 하는 일이란, 내가 좋아하는 취미, 성격, 패션, 가치관, 습관 등 너무 많은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것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인데 말이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그림을 다시 시작하고 싶으면 그냥 시작해. 아티스트들은 이걸로 돈이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생각하지 않잖아.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일단 시작해”
그렇게 해서 나의 마음속의 한 짐은 덜어 놓았다. 다행히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발 벗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나는 행운아일 것이다.(예술계 쪽 일을 하면서 직장인처럼 돈을 다달이 벌어 본 적이 별로 없기에, 남편도 나도 나의 수입은 여행 경비 혹은 보너스 정도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내가 일을 안 하고 있는 건 아니다. 모든 주부들이 그렇듯, 집안일이란 건 해도 티가 나지 않고 안 하면 확 티가 나는 것이니까. 남편과 나는 서로가 맡은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없다면 남편 또한 지금의 일을 해나갈 수 없을 것이고, 남편이 없다면 먹고살 수가 없을 테니.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의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엇 하나도 덜 중요할 수 없다는 것을,,,,서로가 맡은 일을 존중해주고, 서로의 일을 도와준다. (실은 남편이 나보다 살림을 더 잘한다고 할 수 있다. 집안 청소, 빨래, 요리는 말할 것도 없이,,,,아이들을 웃기는 것도. 물론, 나는 남편 레스토랑들의 디자인적, 비주얼적 부분들의 일들을 담당하고, 배우자로써 일 관계에 있어서도 카운슬링 상대가 되어주곤 한다.)
일단, 경제적인 면의 마음의 부담은 덜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그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손에서 연필을 놓아본 적이 없었던 내가 플라멩코에 미쳐서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예전과 같은 작업들과는 좀 다른 형태의 작업들을 했고, 그러다 보니, 드로잉을 해도 내 맘 같이 나오지 않았었다. 드로잉이라는 건 역시 시간과 함께 쌓여가는 것이기에, 손을 한 번 놓으면 놓은 그 세월만큼 투자해야지만 나오는 것 같다. 또한, 그림이 그려지려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는 컨디션 이어야지 무언가가 나올 텐데, 하루 웬 종일 아이와의 즐거운 하루에 정신이 팔려있다 보면, 밤이 되어 아이 옆에서 그냥 같이 잠들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왠간히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서는 그림 또한 그리는 게 쉽지가 않았다.
몇 년 전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밤, 여러 장을 찢어버리며 그리다 그리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드로잉이 한 장 나왔었다. 이 그림이 나오기까지 가슴이 펄떡펄떡 뛰고, 손이 떨리도록 두려웠다. 다시는 예전처럼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까 봐,,,,그래서 이 작업의 제목은 "두려움"이다. 다시는 예전의 나를 만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세상 모든 엄마들에게 바치는 드로잉이다.
급하게 가지 말자.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자. 조급해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가는 것이다. 삶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작업의 깊이도 깊어지는 것이니, 그림을 좀 적게 그린다고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하루에 한 장이라도 꾸준히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급한 마음의 나를 다독인다. 물론 예전에 작업만 할 수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고작 하루에 1-2시간을 그림 그리는 데에 투자한다는 건 너무도 턱 없는 작업량과 시간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에 작업에만 매달리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예술가이자,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다. 세상의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 하루 24시간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하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하루하루가 쌓여서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면 어떤가! 현재 순간순간을 오감으로 느끼면서 살아가면 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