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두 번째 이야기
그렇다! 나는 한 남자와 3번 결혼한 여자다.
세비야에서의 9월의 어느 날, 나는 나의 친구와 함께 나의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어디를 가든, 나의 집에서 중심가를 가기 위해선 그의 레스토랑을 지나치게 되어 있었다. 우리의 만남은 남편의 버전으로 서술하였을 때 로맨틱 영화와도 같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주방에서 레스토랑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보이는 거리를 걸어가는 한 여인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인파가 지나가는 그의 레스토랑 앞 광장에서, 세비야의 뜨거운 태양빛을 받으며 짙은 핑크빛 긴 원피스를 한 손으로 걷어 올린 채 걸어가는 한 여인이 그의 눈빛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런 그 여인이 1시간 뒤, 자신의 레스토랑에 찾아왔다. 비록 이미 레스토랑의 주방은 닫혔으나, 내가 묻는 “아직도 열었나요?”라는 질문에 나의 미래의 남편이 될 그 사람은 “그럼요! 어서 들어오세요!”라며 레스토랑 문을 열어 주었었다. 그리고 요리사인 나의 남편은 이날, 서빙, 소믈리에, 요리사 역할을 모두 전담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이미 주방이 닫혔기에 이제 집에 가서 쉬기 위해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쉬고 있던 모든 동료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와 나와 나의 친구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나의 미래의 남편은 오후의 쉬는 시간을 건너뛰고 밤까지 일한 것이다. 하하핳!!!!
세비야에서 지내면서 공통적으로 여러 서양인들은 동양인에 대한 환상으로 많이 접근하곤 한다. 많은 이들이 동양 여인과의 하룻밤을 꿈꾸는 것 같았다. 그런데 비해, 나의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은, 세비야에서 흔히들 하는 beso (볼에 뽀뽀하는 인사)나 abrazo (살짝 껴안는 인사)는 커녕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 진정 이 사람은 나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그의 사랑은 나에게 보슬비가 촉촉이 적시듯 그렇게 다가왔다. 그렇게 찾아온 사랑은 9년이 지난 지금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런 이 남자와 나는 처음엔 세비야에서 Pareja de hecho라고, 결혼과 같은 법적 영향을 갖는 절차를 밟았고, 결정적으로 5년짜리 체류 허가증이 나온 날은 우연찮게도 내가 세비야의 플라멩코 박물관(Museo de Baile Flamenco Sevilla)에서 전시 오프닝을 하는 날이었다. 덕분에 모든 친구들과 함께 오프닝 파티를 즐기고, 페루 레스토랑에서 자축 파티를 오붓하게 친구들과 함께 했었다.
그러고선, 한국의 부모님과 가족들께 인사드리러 가야 했으나, 임신하는 바람에 출산 후, 남편의 여름 레스토랑 일이 끝난 뒤 8개월 된 첫째 아들과 나의 이탈리안 남편을 데리고 처음으로 인사드리러 한국에 들어왔었다. 결혼식이라는 허례허식은 제발 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당부했으나, 가기 3주 전 가볍게 하시는 나의 어머니의 말씀. “운현궁에서 전통 혼례로 가족들만 초대하기로 했다. 40분밖에 안 걸린다니, 그냥 이벤트라 가볍게 생각하렴~”.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국에서 전통 혼례로 2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의 갓모자를 보고 유럽에 있는 그의 친구들은 "미키 마우스 모자"라며 배꼽까지 잡고 웃어 댔었다.
한국에서 너무 정신없이 있다 보니, 혼인 신고도 잊어버리고 그냥 이탈리아로 돌아와 버렸다. 그러고선 1년 뒤, 이탈리아 구청에서 남편측 이탈리안 가족들과 스페인, 벨기에에서까지 먼 길을 찾아와 준 친구들과 함께 3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스페인에서 알게 된 모든 인연들의 나와 남편의 친구들, 남편의 20~30년 알고 지내온 이탈리안 친구들 모두가 그 작은 이탈리아 집에 함께 모여 시끌벅적하게 몇일을 보냈었다. 그러면서 친구들은 이제 포르투갈에서만 결혼하면 되겠다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렇게 나는 3번을 같은 이 남자와 결혼했다. 올해 결혼기념일은 그의 조카가 얘기하지 않았으면 알지도 못하고 넘어갈 뻔한 것처럼, 우리는 결혼기념일 따위엔 연연하지 않는다. 매일매일이 이 남자와는 축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