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첫 번째 이야기
사랑이라는 말로 그 사람을 나의 새장 안에 가두려 하지 마라. 시간이 지나면 처음 가졌던 설레임이나 열정, 욕망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지만,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던 마음과 함께 지내온 시간과 추억이란 게 남을지도 모른다. 혹은 서로가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서 가슴이 찢어지는 이별이나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는 나의 심장을 원망하며 그 사람을 보내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동안에 쌓아온 모든 우정, 신뢰, 교감했던 모든 것을 지워 버린다는 건, 당신의 인생에서 그렇게도 커다랗던 공간을 불도저로 파듯이 없애버린다는 건, 너무 아깝지 않을까? 물론, 사랑이 아니었는데, 눈이 멀어 사랑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 취해서 지낸 적도 참 많았다.
나와 나의 남편은 서로의 과거의 연인들과 거리낌 없이 교류를 하고, 이들과 소중한 가족, 친구로 남아, 서로를 아끼며 지내고 있다. 가장 힘든 순간에 그의 전 여자 친구 Vanesa에게 직접 전화 걸어 나의 남편을 도울 수 있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녀의 결혼식 피로연을 나의 남편의 세비야에 있었던 레스토랑에서 열었었다. 나 또한, 나의 전 남자 친구의 결혼식의 신부 들러리 및 증인이 되기도 하고, 이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밤중에 내게 흐느끼며 전화해주던 그의 아내가 있었다.
또한, 오랫 만에 이탈리아로 회의 때문에 들린 남편의 전 여인인 Sabrina에게 남편은 자신의 아내와 두 아이를 꼭 소개해주고 싶어 했으며, 우린 밀라노의 한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따스한 오후를 함께 보냈었다. 그녀 또한, 남편이 Vanesa와 헤어져서 힘들어할 때, 결혼식을 3주 앞두고 암스테르담에서부터 세비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5일 동안 남편 곁에서 도움을 주었었다.
그의 첫 여자 친구였던 Ciara와의 거리낌 없는 왕래는 나의 남편의 50세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그와 내가 만나기 이전에 모든 과거는, 지금 현재의 그와 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들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의 과거를 존중해주고, 이제 사랑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언제나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좋은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우리는 행운아이다.
밀라노 공항에서 포르투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짧은 글귀를 썼었는데, 때 마침 오랫 만에 8년간 함께해온 나의 남편의 마지막 전 여자 친구 Vanesa의 가족들과 연말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2박 3일) 세비야를 떠난 뒤로는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했던 그녀의 가족들을 정말 오랫 만에 보게 되었다.
세비야에서 알게 된 인연들의 사람들을 다른 장소에서 함께 만나는 건 참 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4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결혼할 때 와준 지인들이 그랬고, 이번 연말에 포르투갈에 모인 친구들 또한 그렇다.
그렇게도 기다려오던 남편의 전 여자 친구인 Vanesa와 그녀의 남편 Oscar 그리고 쌍둥이 아이들 Elisa와 Zoe와의 시간은 오랫동안 함께 못했던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너무도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또한 아이들끼리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거리낌 없이 노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한국에 다녀오느라 만나지 못했던 남편의 친구인 Matteo와 Maja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깜찍 금발 소녀인 Anji. 10년 넘게 지내오던 세비야의 삶을 청산하고 2년 전 포르투갈로 옮겨온 프랑스 부부인 Nadie와 Juan-Claude.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