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arling May 07. 2019

그녀의 동거인 리스트

#009 아홉 번째 이야기

유럽에선 법적으로 성인으로 인정받는 만 18살이 되면, 여행으로 건, 대학 때문이 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서 독립하여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렇게 부모님의 집에서 나와 살면서 자금적 여유가 없는 이들은 한집을 여럿이서 공유하는 이른바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미드의 friends나 한국의 시트콤인 남자 셋 여자 셋처럼 젊은이들이 함께 한 집을 공유하며 때론 진정한 친구나 연인, 가족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원수가 되어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떠나 버리기도 한다.


내 경우엔, 세비야에서 처음 한 달만 지내게 된 집에서부터 나의 첫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싸가지 없는 독일 여자애가 나갈 때마다 자기 방문을 열쇠로 걸어 잠그고, 좀 착해 보이는 다른 방의 독일 청년이 이것저것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두리 몽실 이상한 동거 생활을 하며, 나도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다녀야 하는 건가? 샤워할 땐 대체 방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라는 의문을 가졌고, 미드나 한국 시트콤으로 내심 품고 있던 환상은 확 깨져 버렸었다. 그러다,  2주 뒤에 모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본의 아니게 나머지 2주간 혼자서 집안 전채를 소유하게 되어 그새 사귄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었다.


결국 혼자 남은 나, Sevilla, Spain

그러다 어학원 친구의 소개로 들어가게 된 스페인 집주인 남자인 호세 Jose와 가족애를 처음으로 느끼며 서로 의지했던 지선과의 동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주인인 호세 jose는 스페인에선 보기 드물게 집에선 절대 시끌벅적한 파티를 열지 않는 젊은 광고 디자이너이자 창설자였다. 커다란 광고 디자인 회사에서 따로 나와서 친구들과 함께 회사를 열어 꾸준히 기발한 아이디어로 작업해 영국 에스콰이어 잡지에도 그들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그는 일이 끝나고선 가볍게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기도 하지만,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걸 즐겼다. 나의 처음 스페인 유학 생활에서 가족애를 느끼게 해 준 짧지만 강렬한 2달을 함께 보낸, 스페인 어학 공부를 하기 위해 온 지선이는 장난반 진담 반으로 나를 "엄마! 엄마!"하고 불렀었다. 여느 집의 맏며느리감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으면서 애교와 엉뚱함, 일품요리 솜씨인 지선과의 동거 생활은 스페인에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줬었다. 우리들은 각자의 공부와 일이 끝나고서 밤이 되면 거실에 모여 알아듣기 어려운 스페인어 방송을 함께 시청한다던가, 어학원에서 가져온 온갖 머리 아픈 복습과 숙제를 골머리 썩여가며 공부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호세 jose한테 물어보곤 했었다. 이렇게 호세 jose는 우리의 개인 가정교사이자 오빠 같은 존재였다. 가끔 호세네 친구들과 함께 주말에 맥주 한잔을 걸치기도 하며 조금씩 조금씩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들은 가족처럼 지냈다. 또한 호세 Jose는 나의 플라멩코 로고 디자인과 명함 제작을 손수 도와주어, 스페인에서 플라멩코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위한 발판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지선과 붙을 대로 붙은 정은, 헤어질 때 눈시울을 흠뻑 적셨었다. 그녀가 내 품에 안겨 흐느끼며 조금만 더 일찍 만났었더라면 한국 돌아가는 일정을 그렇게 땅기지 않았었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토해냈었다.


지선과 이탈리안 친구와 함께, Sevilla, Sapin


지선이 떠나고 일주일 뒤 이탈리아 출신인 에바 Eva가 호세의 집에 들어왔다. 꽤 수다스럽던 이탈리아 녀가 집에 발을 들여놓던 그 순간 호세 Jose가 첫눈에 반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녀에게 바르셀로나에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호세 Jose는 티 안 내려고 침묵을 지키고 절대 선을 넘기지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나로선, 호세 Jose가 그녀에게 꽤 빠졌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었다. 겉으로 보기에 친절하고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게 행동하려는 수다쟁이 에바 Eva는 마음까지 나누기에는 뭔가가 좀 걸리적거렸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웃으며 함께 동거 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러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바르셀로나에서 찾아오면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인사만 나누고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집에서 10분 거리의 어느 바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의 남자 친구는 혼자였고, 에바 Eva의 거짓된 행각이 다 드러났던 것이다. 자기 여자 친구를 보기 위해 멋들어진 모토를 몰고 바르셀로나에서부터 달려온 꽤 잘생긴(외모적으로는 호세 Jose보다 아주 월등했다.) 그는 세비야에서 길 잃은 고양이마냥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었다. 그렇게 그와 에바 Eva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세 jose와 에바 Eva는 커플로 발달되었고, 나는 꽤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오빠 같은 호세는 나의 물불 가리지 않은 불타는 연애를 꽤 걱정스러워해 주는 가족 같은 존재였다.


호세 jose와 에바 Eva, Sevilla, Sapin
호세 jose가 디자인해준 나의 플라멩코 명함

세비야에서 친구들이 말하곤 했었다. 영화처럼 살아가는 여자라고. 아메리칸 드림처럼 시간이 쌓임과 비례하며 꿈꾸는대로 꿈이 이뤄지던 여자였다. 꿈만 같은 세비야의 생활에서 찬란하지만 너무도 짧게 끝나버린 강렬한 연애로 가슴앓이하던 여자였다. 그런 이 여자 곁에는 다행히도 모든 넋두리를 다 들어주고 새벽까지 술잔을 함께 기울여 주던 플라멩코 댄서였던 멕시코 출신인 절친 닉테Nicte가 있었다. 또한, 세상에 내 편은 단 한명도 없다고 생각될때에, 말수 적은 그녀의 남친이자 지금의 남편이 된 조수아 Joshua의 "너한텐 잘된거야. Menos mal para ti" 의 한마디는 어렵기만 하던 그와 나 사이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친구가 되게 해 주었다. 그녀는 나에게 지낼 방 이외에 의상을 제작할 수 있는 작은 작업 공간을 마련해 주기로 하였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현재 그녀의 남편이 된 미국인 조수아 Joshua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함께 산 기간은 짧았지만, 함께 살기 이전부터 함께 어울려 다녔었고, 이후에 지금의 남편과 함께 살게 되어 따로 살게 되어서도 여전히 우린 친구였으며, 내가 세비야를 떠나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남부 바닷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아도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와 주었다. 이런 닉테Nicte와 조수아 Joshua와의 동거 생활은 또 새로웠다. 이들의 많은 플라멩코 친구들이 자기 집 드나들듯 찾아왔었고, 여러 국적의 친구들과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즐거운 밤들을 함께 보내기도 했었다. 그 덕분에 세비야에서의 플라멩코 디자이너 신참인 나는 그녀의 많은 플라멩코 인맥들과 얼굴을 트게 되었다. 조수아 Joshua는 꽤 잘 나가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써, 나의 플라멩코 웹 사이트를 만들어 주어 온라인상의 판매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닉테Nicte는 플라멩코 댄서로써 어떤 의상들을 선호하는지, 기능적, 비주얼적인 조언들을 해주었으며, 자신의 의상들을 모두 옷장에서 끄집어내어 보여주기도 했었다. 나의 작지만 아늑한 작업실은 옥탑방처럼 옥상에 있었는데, 옥상이 꽤 넓어서 플라멩카 페르시아나 프로젝트 작업을 하기에도 적당했었다. 나는 여기에서 세비야의 강렬한 태양만치 나의 열정을 불사르며 밤낮 할거 없이 작업을 해나갔었다.


절친 닉테Nicte와 조수아 Joshua와 함께, Sevilla, Spain
나의 두 아이와 함께 낮잠을 자고 있는 닉테Nicte와 조수아 Joshua, Portugal


닉테Nicte와 조수아 Joshua가 일 관계로 칠레에 3개월 떠나게 되면서 그 사이에 몇몇의 동거인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한 친구가 지혜였다. 보통 여기 친구들 모두가 그녀를 "지하이"라고 불렀었다. 그녀는 캐릭터 디자인 및 일러스트레이터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서 스페인에 온 유학생이었다. 예술가답게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파고들며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을 반복하는 외골수 같은 아이. 닉테Nicte와 조수아 Joshua가 맡기고 간 2마리 고양이와의 동거를 사랑했던 아이. 우리는 꽤 죽이 잘 맞았고 그로 인해,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그의 집으로 옮길 때, 그녀 또한 나의 세트인 마냥 데리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었다. 거실의 커다란 테이블이나 위층의 개인 테라스에서 햇볕을 쬐며 함께 그림 그리기를 즐겼고, 나의 몇 없는 세비야에서의 독사진들은 죄다 그녀가 찍어준 것들이었다. 남편은 8년째 키우던 2마리의 고양이들이 있었는데, 남편과 내가 스페인 남부 바닷가에서 여름 시즌 일을 하러 가게 되며 역시 그들도 지하이의 차지가 되었었다. 그렇게 각별하게 고양이들과 지내던 그녀이기에, 그녀의 캐릭터 작업 또한 몇 년 동안 고양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고양이들은 그녀 만큼이나 엉뚱하면서도 꽤 매력적이었다.


고양이 마냥 밤낮이 바뀐 엉뚱하지만 매력덩어리인 지하이, Sevilla, Spain


보통 커플과 살고 싶어 하는 동거인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커플들 또한 그들의 개인 공간을 존중받고 싶어 하기에 동거인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더욱이, 그 커플들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그들만의 공간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마씨Massi와 가족의 의미를 더 크게 확장시켰다. 마씨Massi는 16년 전, 마씨Massi가 나의 남편의 스페인 남부의 레스토랑에 일하기 위해 찾아오면서부터 지금까지 끈끈한 가족처럼 이어져가고 있다. 오래 전, 한때 남편이 모든 걸 두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조건에 마씨Massi를 데리고 오는 조건을 걸 정도로 이 둘은 강하게 이어져 있었다. 또한, 마씨Massi는 나와 남편을 결정적으로 엮어주게 된 주피터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그의 멘트가 없었다면 나의 남편이 처음으로 보낸 데이트 신청 메시지를 보지도 못한 채 영영 그냥 잊혀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씨Massi는 자상하고 세심한 성격에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천진한 이탈리안 요리사이다. 내가 처음으로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 남편마냥 눈시울을 붉힌 것도 마씨Massi였고, 첫째 아들 율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갈 때에도 남편과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려준 것도 마씨Massi였고, 율이를 병원에서 남편과 함께 처음으로 우리의 보금자리로 데리고 왔을 때 온 집안에 환영과 축하의 의미로 멋진 풍선들과 사진들을 인화해서 준비해 준 것도 우리들의 마씨Massi였었다. 뒤늦은 마지막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 이탈리아에서의 결혼식의 증인을 맡기 위해 벨기에에서부터 날아오기도 했던 마씨Massi였다. 그때도 우리의 마씨Massi는 눈시울을 붉혔었다. 우리들은 남편과 마씨Massi가 쉬는 날이면 많은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음식과 와인을 즐기기도 하고, 함께 거실 소파에서 한 이블을 덮고 누워 팝콘이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영화를 보기도 한다. 때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날, 셰프로썬 먹지 않을 것만 같은 정크푸드 Junk food를 자정이 넘는 시간에 맥주와 함께 먹기도 한다. 세비야를 떠날 계획을 세울 때에도 당연히 마씨Massi와 함께 어느 나라가 좋을지 얘기하며 모든 미래를 함께 설계해나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예상보다도 더 일찍 갑작스럽게 세비야를 떠나게 되었을 때, 솔직히 마씨Massi에게는 여전히 좋은 조건의 일자리와 친구들이 있었건만, 남편 없는 세비야는 의미가 없다며 모든 걸 정리하고 아무런 미래가 약속된 것도 없이 벨기에로 훌쩍 떠났었다. 그렇게 우리가 헤어지던 날 밤,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는 것보다도 더하게, 남편은 많이도 울었었다. 다시는 예전처럼 그와 함께 지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남편에게 너무도 가혹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마씨Massi는 다시 남편과 함께 하기 위해서 포르투갈로 찾아와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 벨기에에서야 돈은 많이 벌 지언정, 남편과 함께 지냈던 주방이 그리웠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일 년에 6개월이지만 그는 세비야에서처럼 우리와 함께 산다. 쉬는 날은 함께 맛난 음식을 해먹기도 하고, 여행을 함께 가기도 하며, 일이 끝나고서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섬인 사르데냐Sardegna에서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지내기도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우리에게는 두 아이가 생겼고, 이 아이들에게  마씨Massi는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얼음 왕국의 엘사 옷을 입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만화 영화를 진심으로 재미있게 함께 보는, 어미 잃은 아기 새를 돌보며 동물을 아끼는 법을 몸소 보여주는 삼촌이다.


가끔 일터인지 놀이터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들의 주방, Sevilla, Spain
꽃보다 남자 : 둘째인 가이아 초음파 검진받는 동안 이들은 밖에서 이러고 논다, Sardegna, Italy
버섯 캐러 꼭두새벽에 나와서 자동차에 한가득 실어온 날, Spain


근 10년 동안 많은 동거인들과 함께 지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서도 가족처럼 의지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중한 동거인들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었다. 상황이 바뀌고 처지가 바뀌어서 누군가는 먼저 떠나가기도 하고, 내가 먼저 자리를 뜨기도 했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가슴속에 많은 동거인들을 쌓아간다. 가족이란, 피가 섞여 끈끈할 수도 있지만, 공간적, 시간적 제약을 모두 초월해서 지금 바로 내 옆에서 하루하루 일상 속에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바로 당신 옆에 있는 그 혹은 그녀가 가족일 수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교양 없는 여자의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