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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arling May 10. 2019

괴물과 몽상가

#010 열 번째 이야기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먹고 자라나는 괴물이 있다. 이 괴물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모든 위험에서부터 안전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모든 장치와 시스템을 먹어치운다. 사람들이 철저하고 더욱더 견고하게 시스템들을 만들어 갈수록 솜사탕이 불어나듯이 그 덩치가 불어나간다. 이 괴물은 점점 더 배고파하고, 그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불안을 먹으며 점점 더 거대해져 간다. 이 괴물을 다시 옷장 속에 가두어 버릴 수 있을까?


얼마 전 우연히 Netflix에서 보게 된 영국 단편영화 시리즈물인 Black Mirror 중  Arkangel를 보게 되었다. 이 단편 영화는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불안들을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것들이 어떻게 삶에 되돌아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 엄마는 자신의 어린 딸을 잠깐 동안 놀이터에서 잃어버려 패닉 상태에 놓인다.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짧은 순간이지만 이런 공포의 시간을 가져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그 이후 이 엄마는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아이의 머리에 칩을 짚어 넣어서 위치를 추적할 수 있고, 아이가 바라보고 듣는 모든 것을 모니터를 통해서 볼 수가 있게 된다. 또한,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보호하는 기능까지 부여해, 공포, 두려움, 무서움, 질투, 슬픔, 상실, 아픔 등의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하여 보지도 듣지도 못하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몇 년간은 아무런 탈 없이 지내는 것 같았으나, 이러한 감정의 결핍은 결국은 아이가 자라나는데 불균형을 초래함을 깨닫고, 엄마는 모니터링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한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나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어 이성에 눈을 뜨게 되고, 엄마 몰래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는걸 엄마가 눈치채면서 모니터는 다시 켜지게 된다. 몇 년 만에 키게 된 모니터에서 자신의 딸이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며, 엄마는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를 찾아가 자신의 딸에게서 떨어지라고 경고하고, 딸 몰래 아침 주스에 임신 예방을 위한 약을 넣어 마시게 한다. 뒤늦게 자신이 임신했었고, 더 이상은 임신 상태가 아님을 의사의 말을 통해 알게 된 딸은 엄마의 방을 뒤집어 엎어서 엄마가 자신을 다시 모니터링 하기 시작했단 걸 발견하게 된다. 감정이 격해진 딸은 모니터로 엄마를 때려 모니터를 부수고, 홀연히 집을 떠나 버린다. 그렇게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장치들로 인해 이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것으로 우리들에게 무언의 경종을 울린다.


아이의 머리에 칩을 넣는 장면, Black Mirror 중  Arkangel
딸을 찾기 위해 모니터를 들은 엄마와 이를 바라보고 있는 딸의 시선이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모니터를 통해서 알게 되는 장면, Black Mirror 중  Arkang


우리들은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 겪을 여러 감정들을 옆에서 지켜봐 주고 함께 있어줄 수는 있지만, 이를 대신해줄 수는 없다. 아이의 길을 부모가 다 만들어 줄 수는 없다는 것. 부모가 만들어 놓은 인위적인 동화 같은 세상에서 아이들을 살아가게 할 수는 없다. 아이들은 주체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야 한다. 아이들이 온전히 격고 넘어가야 할 모든 감정들, 그것이 비록 아프고 힘겨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또한, 아이들은 우리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만치 그렇게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고 약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이 겪을 힘겨운 일들도 옆에서 지켜봐 주고 기다려준다면, 아이들은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해 나간다. 한 예로, 2년 전, 첫째 아들 율이가 만 4세일 때였다. 여느 해처럼,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로 떠났다. 매년 6개월 동안 매일같이 함께 놀고 지내던 정들을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조금 크니까 쉽지가 않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첫아들 율이는 여러 집을 옮겨 다니는 게 익숙해져서 조금 덜했지만, 남겨지는 숲 속 유치원 친구들에게 율이의 빈자리는 더욱더 컸었다. 그런 이 아이들이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는 방식은 기발했다. 아이들의 말로는, 실제로 율이는 떠난 게 아니라, 저기 나무 풀이 높이 우거진 풀잎 사이에 숨어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아이들은 율이가 보고 싶을 때면, 종종 그곳으로 가서 율이에게 말을 걸고 오곤 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아이들 뒤로 보이는 나무 풀이 높이 우거진 풀잎 사이에 숨은 율이에게 종종 가서 이야기를 거는 아이들


아이들의 실종이나 납치 뉴스를 들으면, 아이 둘을 가진 엄마로서 심장이 철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런 사건들은 존재했었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정보의 유통이 지금만치 신속하고 빠르지 않았기에 지구 반대편, 아니 바로 옆 나라의 소식도 전해 들으려면 꽤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듣지 못하기도 했었다. 요즈음에 들려주는 엄청나게 불어나는 정보량과 뉴스에는 해괴망측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바로 옆 나라나 바다 저편의 사건들은 마치 바로 옆집에서 일어난 것만치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솜사탕처럼 불어나게도 만든다. 뉴스만 바라보면 이 세상에 더 이상 희망이란 없을 것만 같이 보인다. 이렇게 현대 사회는 불안을 조장함으로써, 더 많은 쓸데없는 것들을 소비하게끔 하고,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불안하게 되는 모순을 낳는다.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더욱더 강박적이고, 히스테리적으로 만들고, 더욱더 외롭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들이 우리를 무장시키게 하고, 더욱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들어 버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라는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말이다.


1987년도 산 자동차인 Ritmo,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이 차를 레스토랑용 차로 구입하고서 뿌듯해하는 나의 남편, Spain



나의 남편은 자동차 문 안 잠그기로 꽤 유명하다.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습관에, 차에서 내릴 때마다 문 잠그란 나의 잔소리에 오히려 그는 뭐가 그렇게 너를 두렵게 하는데? 아무도 안 훔쳐가. 왜 굳이 차 문을 잠가야 하는데?라고 되려 물으며 나를 비정상인처럼 바라보았다. 처음엔 너무 황당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동차 문을 잠근다고, 내가 마치 비정상작인 것처럼 취급하지 말라고 얘기하곤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이런 무장해재한 간 큰 남편과 오래 살아가자, 나 또한 이런 비정상인의 바이러스에 간염이 되어 느슨한 정신 체계를 갖게 돠었다. 하긴, 우리는 단 한 번도 비싼 자동차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항상 최소 15년 이상 된 차를 구입했었고, 가끔 여행으로 빌리는 렌터카는 조금 신경 써서 문을 잠그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남부 바닷가 마을은 누군가가 차를 훔치기에는 너무도 순박하고 진솔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가지지 않으면, 잃어버릴까 봐 문을 걸어 잠그거나 보이지 않는 도둑들을 대비해 무장할 필요도 없게 된다.



나는 아직도 꿈꾸는 공상가이다. 만약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사회라면, 물질적 사유가 중요시 여겨지지 않아 담 높이가 낮아지고, 대문이 가진 기능이 첨단을 달리지 않는, 자동차 문을 굳이 잠그지 않고도 편안히 다닐 수 있는, 다시금 아이들이 부모님들이 동행하지 않고도 놀이터에서, 골목길에서 자기들끼리 놀 수 있는, 이런 유토피아적 사회를 꿈꾼다. 다시금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먹고 자라나는 이 괴물을 옷장 속에 쑤셔 넣어버리는 멋진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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