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여덟 번째 이야기
만약 누군가가 "무인도에 떨어졌는데 딱 한 가지 가지고 갈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냐"라고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나의 이탈리안 요리사 남편을 챙겨갈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무인도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남자와 살고 있다.
집 좀 지어본 솜씨와 눈썰미까지 있는 기능, 센스남.
전기는 물론이며, 집안에 뭔가 고장 나면 척척 고쳐내는 맥가이버 뺨치는 이상남.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그 솜씨로, "저예산으로 레스토랑 오픈하기 전문가"가 되어버린 오너.
(이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풀겠다.)
게다가 밥도 잘 지어 줄 것이 아닌가!!!
이에 비교해서 나란 인간은,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동반하기에 최악인 인간 후보 5위안에는 들 것이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가정, 교련, 기술이란 과목은 그저 형식적인 것이었으며, 하물며 있던 그 과목도 예고에 가면서 수능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없어져 버렸으니. 대학에 들어와서도 교양과목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다지 내 교양을 높인다기보다, 학점을 채우기 위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많았었다. 이렇게 나는 교양 없는 여자였다. 교양 없는 이 여자는 책을 읽어도 전문 예술책, 철학책들을 파고들었고, 원하는 게 있으면 한쪽만 깊숙이 파고들기만 하니, 내가 가진 지식이란 편협적이고 얽히설키 엉성하게 짜인 거미줄 같은 것이었다. 교양 없는 이 여자는 예술 좀 한답시고 화려한 손놀림과 몸놀림으로 잘도 이럭저럭 숨기며 살아오다가, 유럽 땅에서 엄마가 되어버렸다.
아이 둘을 키워가며 교양 없는 이 여자는 "헛 공부했었구나" 하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관심사를 따라 함께 공부해 나가다 보면 어릴 적엔 쳐다도 안 보았거나, 궁금하기 이전에 이미 그냥 그냥 알려줘서 외워버리거나 시험이나 수능에 안 나오니까 아예 배울 기회조차 없던 것들이 허다했다. 예를 들면, 첫째 아들이 만 5세가 되었을 무렵, 친구들한테서 받은 생일 선물 중 돌들을 캐서 보물들을 발견하는 보물찾기 놀이가 있었었다. 워낙 손으로 꼼지락거리고 만드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인내심이 바닥인데도 불구하고 한 시간을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보물들을 찾겠다고 작은 망치와 조각칼, 붓들을 가지고 미래의 지질학자처럼 돌조각과 씨름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부터 이 아이의 광물 놀이가 시작이 되었었다. 광물들을 찾기 위해 숲에서 바다에서 돌멩이들을 줏어와서 망치로 깨고, 광물 책들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엄마의 얼마 안 되는 보석함을 끄집어내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도 직접 보았다. 이렇게 아이들 덕분에 다시금 새롭게 탐구하고, 관찰하며 공부하게 된 것은 광물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교양 없는 이 여자는 생각해본다. 어릴 적 망치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았는가. 아니 만들 생각은 했었는가. 미술시간이나 과학시간 이외에 무언가 기막힌 발명을 하기 위해서 이것저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볼 생각은 해보았는가.
이 결과물은 정말 처참하다. 전기 불이 나가면 몇 와트의 것으로 갈아야 하는지 볼 줄도 모르고, 전기가 나가면 두꺼비 집에서 무엇을 건드려야 할지도 모르며, 세탁기에 문제가 생겨 수로를 닫아야 할 때에도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른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녀, 교양 없는 여자가 되어 버린 데에는 감히 사회적 차이를 먼저 탓하고 싶다. 유럽은 인건비가 비싸기에 집안의 일들은 남자든 여자든 알아서 자신이 해결하는 게 보통이다. 이런 분위기의 조성은 아이들이 익숙하게 부모님들이 재봉틀을 돌리고 망치를 두드리고 톱을 드는 걸 보고 자라게 되고, 이를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부모들 곁에서 남는 여러 재료들을 가지고 온갖 진귀한 발명품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일들이 하잘것없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기술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여기 사회 분위기와 구조는 가정과 교련, 기술을 허대접 하지 않는다. 다행히 무인도에 꼭 데리고 가고 싶은 나의 맥가이버 남편 덕에 우리 아이들은 아빠가 망치질할 때 함께 망치질을 하고, 집을 고칠 때 함께 고치고, 톱질도 함께 하고, 이제는 자신의 목공 칼도 다룰 줄 알게 되었다. 서당개 3년이면 글을 읊은다고, 아이들은 이렇게 아빠의 어깨너머로 삶에 필요한 진짜 기술들을 배워나간다. 한 5년만 더 지나면 무인도에 데려가도 괜찮을 거 같다.
이 교양 없는 여자가 다행히 아이 둘을 낳고 아이들과 살아가며 다시 교양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내게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이렇게 다시금 사람 되기를 배우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그냥 지식을 전달해주거나 머리를 채우기 이전에,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노동의 가치란 무엇인지 함께 배워간다. 아직도 뜬 구름 위를 걸어가는 몽상가이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마음과 기술들을 아이들과 함께 조금씩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