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역사책을 읽는다. 늙으면 역시 역사지.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는 만만해 보이지만 안 만만하다. 늙어서 그런 건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아무리 읽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두문자'까지 만들어 외워보지만 소용없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무갑기을.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무계중인. 연산군 시절은 참 사건도 많았군. 이런 식이라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나. 회사는 기네스북에 미리 전화라도 해놓은 기세로 서커스 같은 인사와 조직개편을 반복한다. 회사나 세상이나 다를 게 없고, 돈은 애초에 글렀으니 기를 쓰고 허망한 권력놀음으로 소일한다는 심정. 밀려나는 사람들을 보면 과도하게 감정이입이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저 꼴이 나겠군. 하루는 술에 취해 꿈에서 저승사자를 만났다. 놀랍게도 TV 사극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동네로 가서 왠지 그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끝이군요. 혹시 여기가 천국인가요? 저승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봤던 풍경을 골똘히 복기해봤지만 기억은 금세 희미해졌고 고향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도 꿈에서 무릉도원을 보았다. 만사가 형통이던 정묘년 봄이었다. 당대의 지성 박팽년, 최항, 신숙주와 함께 학문과 예술과 권력을 만끽하던 안평은 꿈에서도 그들과 무릉도원을 걸었다. [안평]의 저자 심경호에 의하면 "그것은 청백하여 차라리 쓸쓸하기까지 한 그런 꿈이었다." 명나라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조선의 삼절 안평은 한때 황표정사를 장악한 당대의 권력이었지만 계유정난으로 유배자가 되었다. 권력과 예술은 허무한 꿈이나 다름없었고 인생은 몽유도원 같은 신기루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약을 들고 나타난 금부도사로부터 숙모와의 상간이 자신의 죄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꿈같은 인생은 차라리 무참한 농담이었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떼돈을 벌고, 어떤 사람은 늙을수록 여유가 생긴다는데, 나는 늙을수록 그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택배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애초에 잘못된 것들. 인생은 늘 우연에 멱살 잡힌 채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아침마다 세면대 거울을 보면 어젯밤까지의 인생이 모두 꿈인 것 같은 낭패감에 사로잡힌다. 어차피 하루도 못 가 잊힐 꿈이라면, 인생은 다 무슨 소용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