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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chroid Aug 04. 2017

김영하의 소설집 [오직 두 사람]

쉽게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특히 신문기자들이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문장을 쓰는 자들이 좋은 글 운운이라니. 이런 정의는 글이 독자에게 팔리는 상품이거나 전달하는 정보라는 관점에 근거한다. 그러나 '쉽다'라는 형용사에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함의가 있다. 

그렇다면 쉽게 읽히는 문학은 좋은 문학인가? 누구도 톨스토이를 쉽게 읽을 수 없고 김영하도 [토지]를 읽지 못했다. 읽기 어려운 글 중에서 잘 쓴 글은 무수히 많다. 오히려 확률적으로는 잘 읽히는 글 중 못 쓴 글이 더 많다. 일상언어에서 '쉽다'는 건 두뇌작용에 걸리는 시간이 짧다는 말에 불과하다. 쉬운 것이 좋은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실제 삶에서 그런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심지어 삶은 이미 그 자체로도 어렵다. 이해가 잘 안 가는 글은 잘 모르고 쓴 글이라는 오만한 태도는 책상물림의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대학교 신입생 때 처음 펼친 전공 교과서는 어땠는가. 만약 문학이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문학은 어떻겠는가.


김영하 소설이 쉽게 읽힌다는 건 그래서 조심스러운 지점이다. 이 가독성 문제는 김영하와 다른 작가들을 가르는 주요한 특징이었다. 그의 문장은 평이하고 통속적 플롯은 빠르게 전개된다. 그의 세련된 스타일은 1990년부터 2000년 초반의 경향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별다른 습작시절 없이 데뷔하여 삼십대에 대한민국에서 소설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호사를 누린 김영하의 인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주제다. 한동안 판단을 유보하던 독자들이 [살인자의 기억법]을 받아들고 반신반의하던 중, 그는 자신의 장기로 중무장한 단편집과 TV 예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흥행의 소설가. [오직 두 사람]은 역시 쉽게 읽힌다. 그리고 그 쉬움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다.


 아빠를 겨우 제 침대에 눕히고 저는 거실 소파에 누워 보지도 않는 홈쇼핑 채널을 켜놓고 밤새 생각했어요. 근데 오래 생각한다고 현명한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그래, 그 여자를 아빠에게 다시 데려다주자. 그리고 나는 아빠에게서 벗어나자. 아빠가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이번에는 진짜 인연인가보다. 열아홉 살 겨울에 유럽의 미술관들을 찾아다니며 불멸의 아름다움을 논하던 소녀는 어디에 갔을까? 다시 그 아이를 찾아오자. 그런 생각으로 그 여자를 찾아갔던 거예요. 미용실 일이 끝날 때쯤에 가서 만났어요. 여자는 스태프들을 내보내고 제게 커피를 내주었어요. 곤혹스러운 척했지만 승자의 미소 같은 게 입가에 어려 있었어요. 
 "아버지가 가보라 그래요?"
 여자가 물었어요.
 "아니요. 제가 그냥 왔어요."
 거짓말도 적당히 하라는 투로 여자가 피식 웃었어요.
 "그냥 왜 왔어요?"
 준비해간 말이 있었지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입을 꾹 다물고 커피만 마셨어요. 
 "한 잔 더 줄까요?"
 여자가 커피포트를 가지고 와서 따랐어요. 저는 말없이 한 잔을 더 마셨어요. 그리고 입을 열었어요. 
 "얘가 야동을 봐요."
 여자의 웃음기는 바로 사라졌어요. 
 "뭐라고요?"
 "얘가 성적으로 조숙하다고요. 아이패드에 야동이 가득해요. 저희 집에서도 야동만 봤어요."
 여자의 얼굴이 좀 붉어졌던 것 같아요.
 "성교육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 얘기 하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그렇다고 했죠. 그러자 미용실 여자가 열쇠 꾸러미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저도 따라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어요. 문 앞에서 그 여자가 그러더군요. 
 "난 못 배웠어요. 그래서 배운 사람들은 나한테는 없는 교양이라는 게 있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아버님을 보고 처음 알았고 오늘 또 알았네요. 아버님 잘 모시세요."
 거기가 바닥이었어요. 더 내려갈 데가 없는 곳.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몰라요. 와서 울지도 않았어요. 슬픔, 서러움, 억울함 이런 마음보다는 위기감이 들었어요. 수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어서 수렁인 줄도 몰랐구나 싶었어요. 지금이라도 탈출하자.

- 김영하, '오직 두 사람', [오직 두 사람], 29-30쪽


서간체 소설은 제약이 만들어내는 감정적 이격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 이런 편지는 절대로 쓸 수도, 받아볼 수도 없다는 각성을 쉽게 무너뜨린다.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고 보니 어찌어찌 견뎌냈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언젠가 실수로 지름길로 접어드는 바람에 일등으로 골인하고서도 메달을 빼앗긴 마라토너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결승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윤석은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훌쩍임을 들으며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왜, 모든 것이 어그러졌을까? 마트에 가자고 한 아내의 잘못인가? 부주의하게 카트의 손잡이를 놓아버린 자기 잘못인가? 아니면 화장품 가게에서 클렌징크림을 산 아내의 잘못인가? 둘은 상대방의 부주의를 원망하고 비난했다. 싸움은 상대의 숨겨진 무의식까지 넘겨짚으며 위험구역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원래 애를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대신 벌을 받은 거라고! 미라가 소리를 지르면 윤석은 한때 낙태를 고려했던 미라를 비난했다. 애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너야. 도대체 그놈의 직장이 뭐라고, 애는 천천히 낳으면 된다고 말했던 게 바로 너 아니었어? 가혹한 몇 년이 지나간 후에는 체념과 냉소의 세월이 이어졌다. 그들을 이어준 것은 전단지였다. 그것은 종교적 상징이자 의식이었다. 매달 찾아가는 인쇄소는 그들의 교회였고 전단지는 고난의 현세를 잊고 천국으로 인도할 복음서였다. 그러는 동안 미라의 병은 점점 깊어져갔다. 

- '아이를 찾습니다', 같은 책, 65-66쪽


작가는 어린아이가 선사하는 당혹감을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에 버티고 있던 비극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낼 때, 삶은 납득할 수 없는 끔찍한 '모래지옥'이 된다. 


 휴대폰이 울리자 어머니는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서진은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날 밤 인아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고민 끝에 사채업자 대신에 서진을 불렀던 것이다. 만약 사채업자에게 맡겼더라면 그녀는 아직도 살아 있을 것이고, 이 남자는 그때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아마도 사채업자는 흔적도 없이 사체를 처리했을 것이고 지금쯤 인아는 그와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서진은 생각해보았다. 인아가 죽고 없는 것과 사채업자와 살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자신에게 더 고통스러울까. 살아서 사채업자의 여자가 되어 있는 것이 어쩌면 더 힘들 것 같았다. 인아의 죽음을 두고 이런 상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인아는 죽었고, 그 남편도 곧 죽거나 그에 버금가는 상태가 될 것이고, 사채업자는 교도소에 가게 될 것인데, 자신만 아무 일 없이 무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문득 기가 막히게 좋았다. 행복감이 솟구쳤다. 엄청난 유혹을 이겨내고, 위기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켜냈다는 것에 자부심마저 들었다.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런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진짜 중요한 거야. 그는 이제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릴 적 위인전이나 읽으며 헛된 꿈을 꾸던 감상적 어린아이와 결별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기도 했다.

- '인생의 원점', 같은 책, 107-108쪽


어느 작가에게나 특정한 장기가 있기 마련이다. 김영하의 장기는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이기적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을 묘사하는 것이다. '인생의 원점'은 그의 장기가 잘 드러난 단편이다. 이 장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늘 충무로의 관심을 받아왔다. 


 한 정신병원에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고 믿는 남자가 있었다. 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환자는 몸을 떨며 아직도 닭이 자기를 쫓아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 '옥수수와 나', 같은 책, 113-114쪽 


하수상한 시절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무지의 암흑 속에서 작가는 자신을 규정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정을 통해 진상으로 건너가려는 시도는 늘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객관식 시험에서 확실히 아닌 답을 지워가는 방식으로 정답을 추론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늘 그 마지막 남은 보기에 당도했을 때, 우리는 무지의 심연이 주는 캄캄한 공포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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