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단편집 [대성당]
나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부르기 쉬운 이름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이름을 불러왔다. 나는 한번 더 이름을 불러봤다. 이번에는 소리 내어 불렀다. 웨스, 라고 내가 말했다.
그가 눈을 떴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는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창문을 바라봤다. 뚱땡이 린다, 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그녀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미했다. 그저 이름일 뿐. 웨스는 일어나 커튼을 쳤고 바다는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저녁을 준비하러 갔다. 아이스박스에는 아직 물고기가 몇 마리 남아 있었다. 다른 건 별로 없었다. 오늘밤에 다 먹어치워야겠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 레이먼드 카버/김연수, '셰프의 집', [대성당], 53쪽
삶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이 사람들에게 준 임팩트도 그것이다. 무의미가 무의미하다니. '의미'를 좇는 사람들에게 '무의미'란 일종의 안티테제로서만 의미가 있다. 카버의 위대함은 무언가 무의미하다고 말함으로써 의미를 발견하는 것과 삶의 순간을 도려내서 무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 밀란 쿤데라 같은 대가도 책 한 권으로 써야했던 '무의미'를 카버는 불과 몇 페이지로 보여준다. 예컨대 '셰프의 집' 같은 단편은 8페이지짜리 너클볼처럼 나풀나풀 날아와 돌덩이처럼 삶을 강타하는 무의미의 위력을 보여준다. 삶이 버석거릴 때, 어떤 원형으로서의 무의미가 혓바늘처럼 걸리적 거리고 삶의 모든 의미를 네거티브 필름처럼 현시하는 것이다. 혓바닥의 모든 미뢰들이 감지하는 맛 따위는 어느날 홀연히 돋아난 혓바늘 때문에 모두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녀는 신문을 접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거실로 걸어가 소파 너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다. 그의 가슴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오르내렸다. 그녀는 부엌으로 돌아와 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렸다. 그녀는 레인지의 불을 켜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그녀는 폭찹을 굽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빠와 경매에 가곤 했다. 그 시절 경매품은 대부분 가축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의하면, 아빠는 늘 송아지를 팔거나 사들였다. 때로 농기구나 가정용품이 경매에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축들이었다. 그러다가, 아빠와 엄마가 이혼한 뒤부터, 그녀는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고, 아빠는 그녀와 경매장에 다니던 일들이 그립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아빠가 그녀에게 쓴 마지막 편지, 그러니까 그녀가 자라 남편과 결혼한 뒤 보내온 편지에는 경매에서 멋진 차를 이백 달러에 샀다고 적혀 있었다. 같이 갔더라면 그녀에게도 차를 한 대 사줬을 거라고 아빠는 적어놓았다. 그리고 석 주가 지난 어느 깊은 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와 아빠의 죽음을 알렸다. 아빠가 산 바로 그 차의 바닥에서 일산화탄소가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아빠는 운전석에서 의식을 잃었다. 아빠는 시골에 살고 있었다. 탱크에 들어 있던 기름이 모두 소진되고 나서야 시동은 꺼졌고, 며칠이 지난 뒤에야 아빠는 차 안에서 발견됐다.
- '보존', 같은 책, 68쪽
실직한 남편이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는 바람에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내는 난감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냉장고가 고장나 음식들이 모두 상하기 직전이 되자 아내는 냉장고에 있던 식재료 전체를 요리하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리고 그 요리로 식사를 하고 동네 경매에 참가해서 중고 냉장고를 사와야 하지만 남편은 만사가 귀찮고 아내는 갑자기 아빠와 엄마가 그리워진다. 대개 단편의 가치는 이렇게 일상과 삶을 교직하고 있는 우연과 필연을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의미가 결국 무의미가 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데 있다. 드라마와 영화 덕분에 비현실을 기준으로 현실을 살아야 하는 우리는 어느새 무의미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가상의 국가에서 황당한 교훈을 역설하는 송중기에게 열광한다. 의미와 의지가 현실과 허구를 모두 점령하고 무의미를 의미로, 의미를 다시 일정한 가치로 환원한다. 문제는 무의미가 어떤 가치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의미가 무의미가 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깃털들'에서 부부인 잭과 프랜은 마뜩치않은 직장동료 버드의 저녁초대에서 못생긴 아이와 기이하게 울어대는 공작을 목격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들의 인생이 '여러모로 썩 괜찮다고' 느끼고 그날 밤의 정사로 아이를 가진다. 인생은 늘 행운 아니면 불행이고 무의미가 초래한 의미심장한 이벤트들을 견디고 감당하는 데 바쳐진다.
가뭄에 콩 나듯이, 그는 내 가족에 대해 묻는다. 그가 물을 때면, 나는 그에게 두루 평안하다고 말한다. "두루 평안해"라고 나는 말한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닫고 담배를 꺼낸다. 버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홀짝인다. 진실은, 내 아이에게는 뭔가 음흉한 구석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 애 엄마와도. 특히 그녀와는. 그녀와 나는 점점 말하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는 게 사실이다. 대개 TV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저녁을 기억한다. 어떻게 공작이 그 회색 다리를 들어올려 잰걸음으로 식탁을 돌아왔는지 떠올린다. 그 다음에는 내 친구와 그의 아내가 포치에서 서서 우리에게 잘 가라고 말하는 장면을. 올라가 집에 가져가라며 공작 깃털 몇 개를 프랜에게 주는 장면을. 나는 우리 모두가 악수를 하고, 서로 포옹하고, 이런저런 말을 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운전해 나오는 동안, 차에서 프랜은 내개 바투 가까이 앉았다. 그녀는 내 다리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 상태로 우리는 내 친구의 집에서 우리집까지 차를 몰고 돌아왔다.
- '깃털들', 같은 책, 42쪽
만약 삶이 무의미하고 무의미가 무의미하다면 삶은 마침내 유의미한 걸까? [대성당] 이후 레이먼드 카버는 술과 결혼으로 인해 초래된 기나긴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았다. 취하지 않은 상태로는 견딜 수 없었던 그의 무의미한 삶은 1977년 프레데릭 힐스를 만나 결국엔 쓰지 못한 장편소설의 선인세로 5천 달러를 약속 받은 자리에서 끝났다. 카버는 화장실에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나흘 뒤 마지막 잔을 끝으로 영영 술을 끊었고 25년을 함께 했던 첫번째 부인과도 헤어졌다. 역시 삶을 '개인의 행복'을 기준으로 정의하고 평가하는 일은 늘 턱없는 오해거나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삶이란 그저 삶이고, 아들이 죽은 날에도 삼켜야 하는 빵 같은 것이다.
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녀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경써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지치고 비통했으나, 빵집 주인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빵집 주인이 외로움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의심과 한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런 시절을 아이 없이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말했다. 매일 오븐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비워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가 만들고 또 만들었던 파티 음식, 축하 케이크들. 손가락이 푹 잠길 만큼의 당의糖依 케이크에 세워두는 작은 신혼부부 인형들. 몇백, 아니, 지금까지 몇천에 달할 것들. 생일들. 그 많은 촛불들이 타오르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는 반드시 필요한 일을 했다. 그는 빵집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꽃장수가 아니라 좋았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언제라도 빵냄새는 꽃향기보다 더 좋았다.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같은 책, 127~128쪽